산이 달과 물을 건너오네
허허당 스님의 ‘그대 속눈썹에 걸린 세상’을 읽고
공을 체득하신 스님의 시와 선화에 유발(有髮)이 개칠(改漆)을 할 수가 없어서 특히 마음에 와 닿은 27편의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서평을 대신합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자기혁명
인간은 먹이로부터 사육당하는 일은 잘 없지만
곧잘 의식으로부터 사육당한다.
의식은 한번 사육당하면 좀처럼 깨어나기 힘들다.
자유로워라 그대의 생각으로부터 그것이 혁명이다.
자기혁명 이보다 위대한 혁명은 없다.
진정한 자비
자비란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무한정 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 헛된 욕망을
가차없이 베어내는 것이다.
풀을 뽑지 않고 자르면
금방 또 자란다.
교각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가장 즐겁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도란 참 자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마음껏 뛰고 노는 것
예술, 종교, 철학 이 모든 것들도
바로 그 자리에 가기 위한 교각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안다면
다른 어떤 옷(종교)을 걸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자유로울 것이다.
화살
시위를 떠난 화살은 언젠가 떨어진다.
과녁은 없다 나는 동안 행복하라.
재미있게 놀아라
재미있게 놀아라.
삶도 죽음도 노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한 점 바람처럼
가볍게 놀다 가기 위함이다.
깨달음이란
이 도리를 알고 한세상
가볍게 노는 것이다.
붉은 그리움
해가 진다.
아무도 없는 황금 들판
노을빛을 만나 더 붉고 아름답다.
새들 꼬리에 붉은 그리움이 펄럭인다.
눈으로 보는 것은
더 볼게 없어야 보이고
마음으로 보는 것은
더 알게 없어야 보인다.
나그네
이승과 저승이 둘이라면
나는 기웃기웃
홀로 걷는 두발 나그네
이승과 저승이 하나라면
나는 폴폴
홀로 걷는 외발 나그네
오직 그뿐
가면 가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요.
오면 오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다.
삶을 수단으로 살지 않고
목적 그 자체로 산다면
행불행도 없다.
밤 기차
밤 기차는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영혼을 실어 나른다.
밤 기차는
존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기적을 울린다.
끝에서 끝을 보라
끝에서 끝을 보라.
외로움의 끝 고독의 끝 슬픔의 끝에서
끝에서 끝을 보면 또 다른 시작이 보인다.
또 다른 시작은 전과 같지 않으리.
수행자는
수행자는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도
결코 그 칭찬 속에 머물지 않고
비난을 해도 그 비난 속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푸른 나뭇가지가
허공을 향해 뻗어가듯
자신을 향해 뻗어 간다.
생명의 길
너는 아느냐?
우리의 인생이 길에서 왔다
길로 감을
그리고 그 길은 한 몸임을
길은 오직 하나의 길
생명의 길임을
그대가 만약 이 길을 안다면
일체생명을 사랑할 것이다.
침묵
무덤이 편안한 것은
아무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끔 무덤 같은
침묵이 필요하다.
나를 버리면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 걸림은 없는
대자유가 있다.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면
세상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다.
나를 버리면 일체만물이 내가 된다.
내가 내가 그리울 땐
가끔은 세상이 그리울 때가 있지요.
내가 나를 유폐시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지만
가끔은 세상이 그리울 때가 있지요.
깊은 산 외로운 섬, 산짐승도 외로워 홀로 울 땐
가끔은 나도 눈물이 나요.
그러나 내가 그리울 땐
더 깊고 먼 곳으로 도망가지요.
어느 객스님을 보내고
오롯이 한 생각
맑게 타오르던 그 눈빛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단풍잎을 젖히고
홀연히 사라져간 스님의 뒷모습
빈자리
가을비 하염없이 내리던 날
아
산이 울고 가을이 울고 온갖 소리들이
낮과 밤이 온통 운다.
존재의 유희
자신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온전한 존재감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감이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갖고 논다.
고귀한 것은
잡초는 몇 번을 밟혀도
다시 고개 들지만
꽃은 단 한번을 밟혀도
다시 고개 들지 않는다.
마치 고귀한 사랑이
단 한번의 상처로
죽어 가듯이
인연법
세상을 크게 보면 손익이 없고
적게 보면 손익이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은 손익이 따르고 출세간적인 모든 것은 손익이 없다.
다만 인연법이 있을 뿐이다.
인연법을 모르면 집착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면 고통이 따른다.
진리란 일체가 무상한 줄 알고 인연법을 따르는 것
이것을 알면 매 순간 자유롭다.
진실한 마음
봐도 본 것이 없고
들어도 들은 것이 없어야
비로소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바로 보는 사람은
봐도 본 것이 없고
들어도 들은 것이 없다.
빈 몸
바람 불어도
거미줄을 물고 있는 댓잎처럼
파르르 떨지 않는 마른 가슴아
별 쏟아지는 밤
빈 몸 허공에 걸어 둔 채
소쩍새 울음만
바람에 실려 가네.
무상을 알아야
무엇이든
내 것을 만들면 괴로움이 생긴다.
지혜로운 자는 천하를 다 가져도
내 것이란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
무상을 알아야 자유롭다.
새벽 참선
새벽에 일어나 참선을 하면
총총한 별들이 모두 내 무릎 위에 내려앉는다.
그중 북두칠성은 내 정수리에 앉아
귀에 걸렸다 코에 걸렸다 하고
신선한 바람은 목과 팔다리를 잘라
순식간에 저 산모퉁이를 한 바퀴 돌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척 붙여 놓는다.
새벽 참선은 나와 만물이 하나 되어
꿈결 같은 즐거움에 휩싸인다.
달맞이
새벽닭이 울고
잃어버린 베개를 찾아 다시 눕는다.
발끝에 모인 이불자락
실밥이 터져 웅크리고 있다.
날 샌다.
안개 속에 피어 있는 달맞이꽃
잎을 오므리며 고개를 숙인다.
안녕! 달맞이야
너도 밤을 새웠구나.
휴유의 밤
방 안에 큰 잠자리 한 마리 들어왔다.
가을도 아닌데 이렇게 큰 잠자리는 처음 본다.
아주 화려한 망사 옷을 입고 천장에 붙어 나를 쳐다본다.
문지방에 걸터앉은 베짱이는 뒷다리를 들고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산기슭에 걸려 있는 새벽달이 뭔가 할말을 하지 못해
꾹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계곡의 물은 바닥을 드러내어 달그림자를 갖지 못하고
실없이 서 있는 나그네의 그림자를
밀었다 당겼다 한다.
방문 앞 큰 바위
겨울엔 방문 앞 큰 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온 산을 지배하는 듯하더니
이제 숲의 포로가 되어
겨우 숨 쉴 만큼 뾰족하게 보일락 말락 한다.
거기 새 한 마리
숨통을 조이듯 내려앉는다.
산중일기
아침 일찍 매미들이 울어 댄다.
깊어가는 여름날에 가을을 예감하는
잠자리들이 공중을 난다.
무엇이든 깊어지면 새로워진다.
감사합니다.
2014년 3월 20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