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속에서 죽지 않는다면 더 강해진다.
‘초인수업,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를 읽고
내가 처음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만난 것은 부모님 슬하를 떠나 대구로 고교를 진학하여 도서관을 찾고 부터이다. 그때가 17살이었으므로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의 일이었다. 처음으로 대한 쇼펜하우어의 명민함과 예리한 논리의 전개는 곧 그에 대한 흠모와 경탄을 자아내게 되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한 구절은 ‘인간은 고뇌와 권태 사이를 오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이후에 접하게 된 니체는 그 당시 처음으로 시작한 객지 생활에서 겪은 갖가지의 갈등과 번민, 생활의 애로에 지치고 좌절하던 나에게 무한한 투지와 분투의 용기를 주었던 것 같고 그 이후의 약 4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고난과 역경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읽게 된 박찬국 교수님의‘초인수업,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를 읽으면서 참으로 오랫동안 의식세계에서는 잊고 지내던 니체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그 동안 미진했던 부분을 좀 더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고 이전과는 달리 새로운 시각에서 니체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기쁘고 또한 고맙게 생각한다.
이 책은 전체 10개의 질문을 명제로 제시하고 그 질문에 대하여 니체와 저자의 생각을 기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주지하시는 것처럼 니체의 표현과 기술은 매우 공격적이면서 독설로 가득 차 있고 그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매우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가는 것이 사실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얼마 전 작고하신 장영희 교수님이 번역하신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이와 관련하여 니체는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안락과 길고 긴 연명이 아니라 자신이 고양되고 강화되었다는 느낌”이라고 보았으며 “가혹한 운명과의 대결을 통해 소수의 인간은 보다 강하고 심원하며 아름다운 존재로 고양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고통과 험난한 운명을 자신의 고양과 힘의 강화 즉 권력의지를 위해 사랑하는 자를 초인(Űbermensch, 超人)이라고 일컫고 있다.
첫 번째 질문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할까?”에서는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 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철학은 우리가 이미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개념화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라는 것이다.
니체는 행복을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두 번째 질문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그리고 아이의 정신으로 발전해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때 낙타의 정신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 대한 허무를 느끼게 되는 사자의 정신으로 발전하며 이윽고 의미에 대한 방황이 끝나면 ‘지금 여기’에 충실한 아이의 삶을 살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철학의 실천성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소위 철학자들이란 사상적으로는 커다란 궁궐을 지어 놓으면서도 실제 인간으로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조그만 집에서 살고 있는 자이다”
세 번째 질문에서,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때 운명애는 숙명론이 아니라 운명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로 이용하고 승화시키라는 철학이다.
“나약한 천성을 가진 자들을 사멸시키는 독은 강한 자들에게는 강장제이다. 강한 자는 그것을 또한 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네 번째 질문에서,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쟁과 투쟁을 승화시키는 방법으로서 ‘경쟁과 투쟁은 내가 겨루어야 할 상대가 나와 비등한 자거나 나보다 더 우월한 존재여서 나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 때에만 정당화 되며 이 경우에만 경쟁과 투쟁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고 고양시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니체는 자연을 거스르고 억압하는 문명과 문화를 비판하면서 거세라든가 근절과 같은 방법은 사실은 자신의 정념을 적절하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의지가 약하고 퇴락한 자들이 자신의 정념과 싸울 때 본능적으로 택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는 관능에 대한 가장 심한 독설은 성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이나 금욕주의자들로부터 나오지 않고, 금욕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었지만 금욕주의자가 될 수 없었던 자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다섯 번째 질문에서,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자는 바로 우리다!”라고 외치고 있다. 니체는 종교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힘을 강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종교와 바울이 만들어낸 그리스도교처럼 지상의 힘이나 쾌락을 죄악시하고 끊임없는 회개를 강요하는 종교로 구분하고 있다. 니체는 종교란 결국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한다.
여섯 번째 질문에서, ‘확신은 거짓말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니체는 특정 종교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든 어떤 확신에 독단적으로 사로잡히는 것이 일종의 자기소외이고, 심지어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바라는 태도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니체는 모든 종류의 독단적 확신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는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특정한 종교적인 이념이나 정치적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하나의 군중을 형성하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일곱 번째 질문에서, 니체에 따르면 우리들은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있는데, 삶의 예술가란 매 순간 도취라는 고양된 기분 속에서 삶과 세계를 아름답고 충만한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하며 생을 긍정할 수 있는 길을 궁극적으로 예술에서 발견할 수 있고 우리들 각자가 예술가적인 정신 상태로 삶을 사는데서 찾고 있다.
여덟 번째 질문에서, 니체는 ‘거리의 파토스’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데 거리의 파토스란 기존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탁월한 인간이 됨으로써 기존의 자신이나 저열한 다른 인간들로부터의 거리를 넓히려는 열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니체는 이러한 열망이야말로 바로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연민은 이렇게 우리를 보다 강해지고 보다 탁월한 인간이 되도록 채찍질하는 거리의 파토스를 제거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이 아니라 채찍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홉 번째 질문에서, 니체는 전통적인 서양 철학과 종교가 인간을 하나의 획일적인 인간형으로 주조하려 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와 더불어 플라톤 이래의 이원론적인 철학은 세계를 피안과 차안으로 나누면서 차안을 가상적인 세계, 피안을 참된 세계로 보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철저히 부정하는 금욕주의자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니체는 이러한 처사야말로 인간들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고 인간을 획일화하려는 지극히 순진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우리가 보통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의식의 이면에 진정한 자기가 있으며 이것을 ‘힘에의 의지(권력의지)’라고 한다.
“감각과 정신은 도구이며 장난감이다. 그것들 뒤에는 여전히 자기가 있다. 자기는 감각의 눈으로 찾고, 정신의 귀로도 듣는다. 자기는 항상 들으며 찾는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요하고, 정복하고, 파괴한다. 그것은 지배하며, 또한 자아의 지배자다. 그대의 사상과 감정 뒤에, 나의 형제여, 강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그것이 자기(自性)라고 일컬어진다”
열 번째 질문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 몸을 다스리라’고 충고하고 있다. 흔히 니체는 기존의 모든 관습과 도덕을 파괴하고 본능과 욕망의 자유로운 발산을 요구하는 사상가로 오해되곤 하지만, 정작 그는 ‘모든 위대한 것과 충일한 힘은 끊임없는 자기극복을 통해서 형성된다’라고 말한다. 더불어 그는 인간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성취한 위대한 인간이 되고 충일한 힘을 갖는 것이지 본능과 욕망을 무분별하게 멋대로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는 감정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넘어서 신체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단순히 감정과 사상을 훈련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가장 먼저 설득시켜야만 하는 것은 바로 신체다. 중요하고 선택된 품행을 엄격하게 견지하는 것, ‘자신을 되는대로 방치하지’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키는 것, 이것들만으로 중요하고 선택된 인물이 되기에 완전히 충분하다”
끝으로, ‘니체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고 저자는 해설하고 있다. 참으로 니체의 철학에 대한 정치한 해설과 탁월한 동양적인 지혜가 어우러진 아름다움이 넘쳐나는 책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그 일체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비록 자신이 젊은 시절 외도로 매독에 걸려서 죽기까지 병고에 시달렸고 개개인의 정서와 가치관에 따라 수긍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현대인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지혜들이다.
감사합니다.
2015년 1월 3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