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에서 풋풋하게 자라는 넝쿨들의 싱그러움과
매미와 피아노 소리가 잘 어울리는 아침입니다.
모든 숨 쉬며 살아 있는 존재들의 활기와
생명들의 발랄함이 느껴집니다.
모두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빕니다.
뜰에서 풋풋하게 자라는 넝쿨들의 싱그러움과
매미와 피아노 소리가 잘 어울리는 아침입니다.
모든 숨 쉬며 살아 있는 존재들의 활기와
생명들의 발랄함이 느껴집니다.
모두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빕니다.
아라비아 반도를 거치지 않고
동방의 향료를 구하려는 노력이
대항해 시대를 낳았습니다.
이미 세계를 향한 우리들의 항해는 시작되었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새로운 대항해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조바심 내지 마시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도록 노력합시다.
아프리카의 사바나를 뒤지며 달리던 기억이 아련해 집니다.
이제 아프리칸 음악을 들을 때면
이전과는 다른 음감과 감동을 맛보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깊이를 알 수 없는 비애와 연민을 느끼게 한답니다.
희망봉(Cape of good hope)의 원래 이름은 폭풍의 곶(Cape of storms)이였습니다.
아마도 Cape Town 앞 바다에는 수백 척의 범선들이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결국 오래 참고 무리하지 않는 삶이
원만한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관리하지 못하면
노예가 됩니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Cape Towm의 The slave lodge를 둘러보면서
노예의 의미를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삶과 여행에는 사고와 실수가 섞여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우리들은 배우고 느끼며
삶은 그만큼 풍요해집니다.
아침에 새소리에 참이 깨서
서재의 창문을 열다가 모과 열매 하나가
나무 잎 사이에 숨어 있는 것을 보았고
돌구유의 연잎 사이에
백련이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일상의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아침입니다.
산이 달과 물을 건너오네
허허당 스님의 ‘그대 속눈썹에 걸린 세상’을 읽고
공을 체득하신 스님의 시와 선화에 유발(有髮)이 개칠(改漆)을 할 수가 없어서 특히 마음에 와 닿은 27편의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서평을 대신합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자기혁명
인간은 먹이로부터 사육당하는 일은 잘 없지만
곧잘 의식으로부터 사육당한다.
의식은 한번 사육당하면 좀처럼 깨어나기 힘들다.
자유로워라 그대의 생각으로부터 그것이 혁명이다.
자기혁명 이보다 위대한 혁명은 없다.
진정한 자비
자비란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무한정 품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 헛된 욕망을
가차없이 베어내는 것이다.
풀을 뽑지 않고 자르면
금방 또 자란다.
교각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가장 즐겁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도란 참 자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마음껏 뛰고 노는 것
예술, 종교, 철학 이 모든 것들도
바로 그 자리에 가기 위한 교각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을 안다면
다른 어떤 옷(종교)을 걸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자유로울 것이다.
화살
시위를 떠난 화살은 언젠가 떨어진다.
과녁은 없다 나는 동안 행복하라.
재미있게 놀아라
재미있게 놀아라.
삶도 죽음도 노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한 점 바람처럼
가볍게 놀다 가기 위함이다.
깨달음이란
이 도리를 알고 한세상
가볍게 노는 것이다.
붉은 그리움
해가 진다.
아무도 없는 황금 들판
노을빛을 만나 더 붉고 아름답다.
새들 꼬리에 붉은 그리움이 펄럭인다.
눈으로 보는 것은
더 볼게 없어야 보이고
마음으로 보는 것은
더 알게 없어야 보인다.
나그네
이승과 저승이 둘이라면
나는 기웃기웃
홀로 걷는 두발 나그네
이승과 저승이 하나라면
나는 폴폴
홀로 걷는 외발 나그네
오직 그뿐
가면 가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요.
오면 오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다.
삶을 수단으로 살지 않고
목적 그 자체로 산다면
행불행도 없다.
밤 기차
밤 기차는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영혼을 실어 나른다.
밤 기차는
존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기적을 울린다.
끝에서 끝을 보라
끝에서 끝을 보라.
외로움의 끝 고독의 끝 슬픔의 끝에서
끝에서 끝을 보면 또 다른 시작이 보인다.
또 다른 시작은 전과 같지 않으리.
수행자는
수행자는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도
결코 그 칭찬 속에 머물지 않고
비난을 해도 그 비난 속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푸른 나뭇가지가
허공을 향해 뻗어가듯
자신을 향해 뻗어 간다.
생명의 길
너는 아느냐?
우리의 인생이 길에서 왔다
길로 감을
그리고 그 길은 한 몸임을
길은 오직 하나의 길
생명의 길임을
그대가 만약 이 길을 안다면
일체생명을 사랑할 것이다.
침묵
무덤이 편안한 것은
아무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끔 무덤 같은
침묵이 필요하다.
나를 버리면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 걸림은 없는
대자유가 있다.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면
세상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다.
나를 버리면 일체만물이 내가 된다.
내가 내가 그리울 땐
가끔은 세상이 그리울 때가 있지요.
내가 나를 유폐시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지만
가끔은 세상이 그리울 때가 있지요.
깊은 산 외로운 섬, 산짐승도 외로워 홀로 울 땐
가끔은 나도 눈물이 나요.
그러나 내가 그리울 땐
더 깊고 먼 곳으로 도망가지요.
어느 객스님을 보내고
오롯이 한 생각
맑게 타오르던 그 눈빛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단풍잎을 젖히고
홀연히 사라져간 스님의 뒷모습
빈자리
가을비 하염없이 내리던 날
아
산이 울고 가을이 울고 온갖 소리들이
낮과 밤이 온통 운다.
존재의 유희
자신감과 열등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온전한 존재감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감이나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갖고 논다.
고귀한 것은
잡초는 몇 번을 밟혀도
다시 고개 들지만
꽃은 단 한번을 밟혀도
다시 고개 들지 않는다.
마치 고귀한 사랑이
단 한번의 상처로
죽어 가듯이
인연법
세상을 크게 보면 손익이 없고
적게 보면 손익이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은 손익이 따르고 출세간적인 모든 것은 손익이 없다.
다만 인연법이 있을 뿐이다.
인연법을 모르면 집착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면 고통이 따른다.
진리란 일체가 무상한 줄 알고 인연법을 따르는 것
이것을 알면 매 순간 자유롭다.
진실한 마음
봐도 본 것이 없고
들어도 들은 것이 없어야
비로소 진실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바로 보는 사람은
봐도 본 것이 없고
들어도 들은 것이 없다.
빈 몸
바람 불어도
거미줄을 물고 있는 댓잎처럼
파르르 떨지 않는 마른 가슴아
별 쏟아지는 밤
빈 몸 허공에 걸어 둔 채
소쩍새 울음만
바람에 실려 가네.
무상을 알아야
무엇이든
내 것을 만들면 괴로움이 생긴다.
지혜로운 자는 천하를 다 가져도
내 것이란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
무상을 알아야 자유롭다.
새벽 참선
새벽에 일어나 참선을 하면
총총한 별들이 모두 내 무릎 위에 내려앉는다.
그중 북두칠성은 내 정수리에 앉아
귀에 걸렸다 코에 걸렸다 하고
신선한 바람은 목과 팔다리를 잘라
순식간에 저 산모퉁이를 한 바퀴 돌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척 붙여 놓는다.
새벽 참선은 나와 만물이 하나 되어
꿈결 같은 즐거움에 휩싸인다.
달맞이
새벽닭이 울고
잃어버린 베개를 찾아 다시 눕는다.
발끝에 모인 이불자락
실밥이 터져 웅크리고 있다.
날 샌다.
안개 속에 피어 있는 달맞이꽃
잎을 오므리며 고개를 숙인다.
안녕! 달맞이야
너도 밤을 새웠구나.
휴유의 밤
방 안에 큰 잠자리 한 마리 들어왔다.
가을도 아닌데 이렇게 큰 잠자리는 처음 본다.
아주 화려한 망사 옷을 입고 천장에 붙어 나를 쳐다본다.
문지방에 걸터앉은 베짱이는 뒷다리를 들고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산기슭에 걸려 있는 새벽달이 뭔가 할말을 하지 못해
꾹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계곡의 물은 바닥을 드러내어 달그림자를 갖지 못하고
실없이 서 있는 나그네의 그림자를
밀었다 당겼다 한다.
방문 앞 큰 바위
겨울엔 방문 앞 큰 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온 산을 지배하는 듯하더니
이제 숲의 포로가 되어
겨우 숨 쉴 만큼 뾰족하게 보일락 말락 한다.
거기 새 한 마리
숨통을 조이듯 내려앉는다.
산중일기
아침 일찍 매미들이 울어 댄다.
깊어가는 여름날에 가을을 예감하는
잠자리들이 공중을 난다.
무엇이든 깊어지면 새로워진다.
감사합니다.
2014년 3월 20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정서와 느낌의 공유로 채색된 여행기
-온다 리쿠의 ‘메갈로마니아’를 읽고
멕시코와 카리브 해는 마지막으로 항해한 지 30여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언제나 따뜻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곳을 거닐어 보면 오랜 세월 전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의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져 오는 인연의 끈들을 느끼게 된다.
기억을 더듬어 1978년 9월에 발급된 선원수첩에서 확인한, 멕시코로 가기 위해서 미국 Los Angeles의 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받은 날이 1982년 12월 9일이었다. 얼마 후 다시 Houston행 국내선 여객기에 탑승해서 자리에 앉으려다가 조금 떨어진 건너편에 십자로 끈이 묶여진 전형적인 인디언 샌들을 신고 있던 Indian 여인을 보았다. 나는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지만 잠시 동안 서로 미소 지으며 깊은 교감과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Mexico의 만사니요(Manzanillo)나 마사틀란(Mazatlan) 또는 아카풀코(Acapulco)에서 거리를 거닐다가 인디언 아이들이 자기들이 손수 만든 다소 주술적인 모양의 토속적인 인형을 사라고 갑자기 뛰어들면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언제나 그들의 웃는 모습이 친근했고 또 한편으로는 측은했다. 그것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상당히 두터운 인연이나 혈연의 끈이 서로 묶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번에 온다 리쿠의 ‘메갈로마니아’를 읽으면서 또다시 그때의 감흥과 연민의 소용돌이가 폭포수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Houston을 이륙한 PanAm 기가 Mexico City에 도착한 것은 1982년 12월 9일 거의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Maritime Overseas Corporation에서 보낸 Agent를 만나 호텔에 짐을 풀고 잠시 심야의 시내를 거닐었고 호텔 인근의 주류회사에서 새벽에 상품을 싣고 나가던 트럭의 행렬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아침에 다시 공항에서 오하카(Oaxaca)행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약 3시간 정도 비행을 한 후 오하카에서 다시 Central American Highway를 달리기 시작해서 점심쯤에 네하파(Nejapa)인근의 몇 집 되지 않는 시골마을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Agent는 우리 일행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소스가 너무 짜고 매워서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파인애플 쥬스로 식사를 대신하였다. 그러나 그곳에도 황소가 있었고 한국의 시골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꼬박 이틀이 넘는 비행과 드라이브 끝에 살리나 크루즈(Salina Cruz)항에 도착해서 10개월 간 기관사로 근무하게 될 M/V Pluto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멕시코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연유이다.
이글은 <NHK 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마야와 잉카를 중심으로 한 중남미 문명시리즈를 방송하면서 발행될 책에 실을 여행기를 기획하면서 저자가 동행하게 된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의 유적들을 약 2주간에 걸쳐 답사한 자료를 근거로 기술되어 있다.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이 여행기는 단기간에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고 관련된 고고학적인 지식의 일천함으로 인해 사실적이기보다는 다소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가미된 환타지에 가까운 구성을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때 10 개월간의 멕시코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84년 약 10 개월간의 카리브 제도와 연안의 베네주엘라, 콜롬비아, 파나마를 다니면서 겪은 중앙아메리카에 대한 인상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기술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매우 복합적이고 심오한 그 무엇인가가 문화의 저류에 흐르고 있으며 그것은 어쩌면 이집트나 터어키 등의 역사보다도 더 복잡하고 신비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다가왔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작가의 고뇌와 탄식에 깊은 공감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답사한 메소아메리카는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400년에 걸쳐 멕시코만 저지대에서 번성했던 올메카 문명을 필두로 한 멕시코 중앙부의 아스테카 문명, 유카탄 반도를 포함한 멕시코 남부에서 과테말라, 벨리즈, 온두라스 일부에 이르는 마야 문명이 발달하였었다.
그리고 고대 안데스 문명은 오늘날 페루를 중심으로 기원전 1천 년경부터 16세기까지 존속했던 여러 문화를 통틀어서 일컫는 것으로서 페루의 쿠스코를 중심으로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광대한 영역에 걸쳐 건설되었던 잉카제국과 겹쳐지는 문명이다.
저자는 ‘메소아메리카의 올메카 문명의 주제가 중미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중동처럼 실로 전 세계적인 문화권을 연상시키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사실상 아스테카의 ‘태양의 피라미드’와 ‘달의 피라미드’로 유명한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유적은 이집트분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발견되고 있는 피라미드 형태의 거석문화이기도 하다.
저자는 멕시코하면 마리아치와 타코스와 사막과 선인장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낙천적이고 소박한 웃음의 뒤에 숨어있는, 서구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유린된 과거 선조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우수와 비애의 감정들이 가슴을 파고든다.
저자가 유카탄 반도의 스푸힐(Xpujil) 유적을 둘러보다가 동네 소년이 탑 사이에 기어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네 사람들에게 유적이란 집 근처에 있는 정글짐 같은 장소일 것이다.’라고 표현한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마치 관광객들은 머나먼 산토리니를 찾아가서 지중해의 석양을 보며 탄성을 지르는데 현지인들은 외로운 낙도에서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을 무료해하는 모습과 너무도 흡사해 보인다.
오늘날에는 2만 내지 1만 5 천년 전에 베링해협을 건너온 인류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조상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고 한다. 마야의 건축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 위에 계속 짓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의 건축에 있어서도 유사한 형태를 띄고 있는 것 같다. BBC 타큐멘터리에 의하면 아마도 마야 문명은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7천 년 만의 유래 없는 대가뭄으로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잉카의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의미로 주변 봉우리의 이름 중 하나가 그대로 도시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에 의하여 발견되었다고 한다.
여행은 시간을 두고 계획해서 충분히 사전 지식을 쌓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록 2주간의 강행군에 가까운 여행의 기록이지만, 이글을 읽으면서 지나간 젊은 시절들을 되돌아 볼 수 있었고 언제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던 멕시코와 카리브에 대한 많은 추억들과 객수에 대하여 깊은 교감을 가질 수 있어서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2013년 10월 20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지구’ 라는 교실
-Salman Kahn의 ‘나는 공짜로 공부 한다’를 읽고
어느 봄날 오후 식탁에서 저녁을 기다리면서 아이에게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단위 거리를 단위시간으로 미분하면 속도가 되고 다시 단위속도를 단위시간으로 미분하면 단위시간당 속도의 변화율 즉 가속도가 구해진다.”고 말하자 집사람이 “그게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냐?”고 물었다. 산부인과 전문의이고 시쳇말로 고교시절 국영수는 날렸다고 하는 우등생조차도 미적분을 그저 공식에 맞춰 풀 줄만 알았지 그 깊고도 아름다운 뉴튼 역학의 절대시간이나 절대공간에 대한 통일성에 대하여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이 지나 온 것 같았다.
몇 주 전쯤 약리학 강의시간에 우연히 “깨달음과 가르치는 것 이상의 큰 기쁨은 없으며 우리들이 공부하고 있는 이 책을 펼치면 언제나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자 모두들 웃고 있었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해도 되나 또 한편으로는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그저 점수에만 연연해온 학생들의 지식체계가 너무 부실하고 구멍투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후배 감염학교수가 20분간 자료를 정리해 와서 발표를 한 학생을 보고 “네가 발표한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라.”고 하자 “그런 것을 가르쳐 주는 학원이 없어서 배우지 못했다.”는 답변을 들었다면서 황당해 했다.
살만 칸의 ‘나는 공짜로 공부한다.’를 읽으면서 우리들의 교육 체계가 흘러온 역사와 배경 그리고 현재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과 가능한 개선책과 대안들에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나의 기본 교육철학은 단순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다. 나는 내가 배우고 싶었던 방식으로 가르치고 싶었다. 즉, 학생들에게 순수한 배움의 기쁨, 우주의 이치를 이해할 때 겪는 흥분을 전달하고 싶었다. 수학과 과학의 논리뿐 아니라 아름다움도 전해주고 싶었다.”
정말로 공감이 가고 진정으로 가르침을 사랑하는 저자의 모습이다.
“나는 학생들이 하나의 수업과 다음 수업 사이의 연관성과 진행을 보게끔 돕고 싶었다. 단순한 정보의 습득에서 한 번에 하나씩 개념을 흡수하며 진정한 통달의 경지로 발전할 수 있는 직관을 연마하게끔 돕고 싶었다. 한마디로 나는 흥분을 되살리고 싶었다. 능동적 학습 참여와 이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흥분, 기존의 커리큘럼이 때로 억압하는 듯한 흥분을.”
매우 공감이 가는 내용이고 나 또한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점수나 진급 그리고 깊이 있는 이해와 지적 체계의 진실한 내면화를 위한 노력과 갈등 속에서 번민하였던 학부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질문과 발표를 포함한 적극적으로 학습에 참여하는 열정과 태도는 하루아침에 구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아주 어린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격려해주고 부추겨 주어야 한다.
사실 완전학습의 개념은 아마도 1970년대 초, 중학교 시절에 문교부에서 ‘완전학습 시리즈’를 출간해서 한 때 학생들에게 판매가 된 적이 있었으나 그 때는 너무 불필요하게 읽어야 할 분량이 많아서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 같다.
이번에 살만 칸이 제시하는 유튜브를 사용한 학습 방법은 이러한 불필요한 예시나 지시문의 문제를 잘 해결하고 무엇보다 1:1의 교육효과를 최대로 살렸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이며 또한 전 세계의 다양한 교육 또는 사회 환경에서도 비교적 접근성이 양호하며 경제적이라는 데에 매우 강력한 장점을 갖춘 교육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각기 다른 다양한 분야의 낱낱의 지식들이 쌓여서 어느 순간 융합에 성공하면 그 지식체계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서 움직이며 그러한 각고의 노력 후에 얻는 성취의 희열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음의 지난한 학문과 연구의 과정을 참고 수행해 갈 수 있는 강력한 추진력과 끈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현재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상업화된 사교육의 선행학습과 어쩌면 반쯤은 포기해버린 공교육의 책임감 속에서 그저 어설픈 지식의 조각이나 아니면 잘 요리되고 포장된 입에 맛는 몇 가지 상품화된 지식의 파편들에 만족하면서 진정한 학문과 배움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박탈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다.
지식의 역사에서 파피루스에 필사한 초기의 필사본은 오늘날 좋은 집 한 채 정도의 가격이었으며 그 후의 목판 인쇄본도 지금으로 따지면 고급차 한 대 값 정도라고 한다. 실제로 한국에도 인터넷이 일상화되기 전인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권의 전공서적은 바로 권력의 표상이었다.
나는 이 책이 현재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교육과 배움의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이러한 문제점들을 근원적이고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개선하는데 있어서 길잡이가 되는 많은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말하고 있다.
“지식은 계속되며 생각은 흐른다.”
많은 가르치시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감사합니다.
2013년 6월 26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