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전쟁의 희생양 대우
신장섭 교수의 ‘김우중과의 대화’를 읽고
1960년대 농촌에는 흙과 짚단과 옹기와 몇 권의 교과서가 전부였다. 빈부의 차도 별로 없이 고만고만했다. 70년대 후반에 와서 고향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져 갔다. 1974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기 위하여 대구로 떠났다. 자취방 살림이라야 책상 하나 부엌에는 라면 박스하나가 전부였다. 연탄이 꺼지면 아침과 점심을 굶고 그날 학교 수업을 마쳤다.
고교를 졸업 후 해양전문학교를 나와서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외항선 기관사로 근무했다. 고교시절 부실했던 공부를 다시 하기로 결심하고 집에서 일 년, 그리고 다시 일 년 학원을 다녀서 1987년 부산에 있는 현재의 모교에 입학했고 1993년 졸업을 하면서 교수님의 권유에 따라 약리학교실에 조교로 남게 되었다. 그때 월급이 80만원이었다. 1997년 전임강사로 임용되어서 그해 여름 2주간 터키와 그리스의 섬들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환율이 달러당 1300원은 되었던 것 같았다. 그해 11월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내가 대우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학부시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다가 대륜고등학교가 있었던 대봉교 건너 방천시장에서 김우중 회장이 신문팔이를 했었다는 것과 2001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에 있는 부하라의과대학교와 모교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모교 대표로 방문했을 때 타슈켄트 시내의 자동차 중 거의 99%가 대우차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 대우해양조선이 세계 선박건조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 신장섭 교수의 ‘김우중과의 대화’를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지금의 풍요를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면서 그때까지의 자신감과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와 한강의 기적을 구가하던 열기는 냉랭할 정도로 식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쇠락의 전기가 된 것이 바로 대우 사태로 기억되는 IMF에 대한, 잘못된 국가와 정부의 경제정책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정부가 개인 기업을 보호는 못할망정 기업주를 해외에 추방하듯이 출국시키고 손발을 묶은 상태에서 외국 세력의 강압에 못이겨서 굴욕적으로 해체시킨 과오는 반드시 밝혀서 공과를 제대로 판정하고 대우라는 기업에 대하여 새롭게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금융을 장악한다면 그 나라의 정권이 어떻게 교체되든 그 주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로스차일드로서 1815년 6월 19일, 워털루 전쟁의 정보를 먼저 알게 된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그날 하루 만에 총 2억3천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벌여들였다. 이들은 유럽의 전쟁 때마다 양쪽에 전비를 대는 방식으로 부를 쌓아갔다. 또한 1913년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만드는데 관여한 자들 중에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이 있었다.
IMF는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에 따라 1945년 12월 미국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1998년, 안타깝게도 르윈스키 스캔들로 시끄러웠던 미국의 빌 클린턴은 그해 11월에 한국을 방문해서 DJ와 정상회담을 한 뒤 “5대 그룹 개혁이 부진하다”고 언급했다. 결국 한국 정부가 이들 압박에 무릎을 꿇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막대한 부의 해외 유출과 기업의 도산 실업자 양산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장기적인 불황과 경기 침체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몰락에도 불구하고 김우중 전 대우 회장께서는 베트남에서 젊은 경영인들을 양성하는 글로블 YBM(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s)과정을 만들고 2012년부터 운영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지난 상처의 쓰라림을 딛고 다시 미래의 희망을 추구하시는 김 전 회장님께 무한한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1960년대의 가난과 현재의 삶을 비교해 보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너무도 나약하고 패기가 모자란다. 모두 심기일전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해 분투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2014년 10월 4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