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자본론(Das Kapital)
‘피케티의 21 세기 자본 바로읽기’를 읽고
한 분의 철학자와 여섯 분의 경제학자들이 설명하고 비판한 ‘피케티의 21 세기 자본 바로읽기’는 피케티의 경제이론 대한 이해와 아울러 현재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부의 재분배에 대한 사회적 요구나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먼저 신중섭 교수의 피케티가 ‘21 세기 자본’에서 주장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상과 대책을 정리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자본주의 본질적 모습이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이유는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서기 때문이며 이러한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부에 대한 누진적 글로벌 과세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신중섭 교수는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직접 숫자로 확인하면 보통사람들은 열 받게 마련이다. 이 열의 강도를 낮출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문제를 사회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것의 실상에 대해 숙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반응은 차분해질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유경제원 현진권 원장은 “불평등 실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흥분하는 이유는, 부자 계층의 몫은 다른 계층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잘못된 생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불평등의 자료의 이면에는 경제를 제로섬(zero-sum game)으로 보는 심각한 인식의 문제가 존재한다. 특정 계층의 점유율이 높아져, 다른 계층의 점유율이 떨어졌다고 해도, 그 사회의 경제성장이 높으면, 점유율이 낮아진 소득계층의 삶의 질은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 경제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포지티브섬 게임(positive-sum game)으로 다른 계층의 희생이 없어도 전체 계층의 절대 소득은 동시에 증가할 수 있다.”고 피케티의 오류를 비판하고 있다.
안재욱 교수는 “피케티의 ‘21 세기 자본’은 사람들을 가난으로 인도하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불평등의 완화가 아니라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세계 모든 국가들이 공조하여 자본 증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이 ‘공산당 선언’에서 “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로 외치는 것과 어딘지 닮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동근 교수는 “성장은 긴 시간으로 볼 때, 불균등을 수반한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모든 계층의 절대적인 소득수준과 ‘삶의 질’이 개선된다. 불균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장의 엔진을 제거하는 것이다. 최고소득계층과 최저소득계층의 괴리에 초점을 두는 것은 ‘증오’를 부를 위험이 있다. 형평과 평등을 강조해온 사회주의 실험이 왜 실패했는가를 반추해야 한다. 성장페달을 밟되, 빈곤계층에 대해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정책조합이다.”라고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한국경제원 오정근 위원은 “피케티의 주장처럼 성장둔화가 분배악화를 초래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업가가 투자를 하지 않아서 고용이 안 되어서 분배구조가 악화된 것이다. 이점을 간과하고 자본가에게 세금을 더욱 무겁게 물리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자본가들은 높은 자본 비용으로 더 이상 투자해도 남는 순이익이 예상되지 않으므로 투자를 줄이거나 해외로 탈출해 일자리는 더욱 없어지고, 그 결과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노동소득 비율은 더욱 줄어들어 분배 구조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영용 교수는 “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소득과 부의 격차는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가장 못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도 꾸준히 개선되어 왔고 앞으로도 개선되어 갈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장의 원동력은 저축을 바탕으로 한 자본의 축적에 있다는 사실은 강조되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상기할 수 있는 경구는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는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얻을 수 있지만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는 자유와 평등을 모두 잃는다. ”라는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좌승희 교수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따라 삶과 경제생활은 영위하면서도 어떤 세계관, 인생관이 각자의 경제적 번영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고 사는 꼴인 것이다.
이런 현실이 타파되지 않는 한 피케티와 같은 ‘경제를 모르는 경제학 기술자’들이 세상을 가지고 노는 일은 계속 될 것이다. 이에 필자는 경제학이 실사구시적 기반 위에서 다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말로 논지를 끝맺고 있다.
2004년 중국 운남성(雲南省)을 2주 정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리짱(麗江)에서 꼬박 하루를 걸려 펑커(奉科)라는 오지를 의료봉사를 한다고 갔는데 19세기의 삶을 사는 그들의 향청(鄕廳)의 벽에는 아직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들의 삶의 수준은 상해나 북경 같은 도시에 비해 거의 백년 정도 차이가 난다고 느꼈다. 공산주의는 토지를 몰수하여서 무상분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러한 권력을 가진 소수가 누릴 자산이 존재하는 동안만 활개를 치다가 종국에는 모두 몰락하게 된다. 정말 우리들 모두가 남의 재물을 파렴치하게 약탈하거나 탐하는 도적 같은 삶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현재의 다양한 사회적인 요구와 현상에 대하여 폭넓고 깊이 있게 고찰해볼 수 있는 많은 기회와 철학적이고 경제적학인 논제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보기 드물게 재미있고 유익한 사회과학 도서라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2014년 11월 15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