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저 감격스럽기만 했다. 드디어 나도 누구나 마시는 커피가 아니라 캡슐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맙기도 했다. 더구나 내 돈 들여 산 것도 아니고 티빙스틱을 사면서 경품으로 받은 제품이니 그 기쁨이 두 배로 늘기까지 했다. 캡슐 커피 맛도 모르면서 무작정 신이 난 이유였다. 박스를 열고 제품을 꺼내면서도 그 감격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박스에는 사용설명서 및 캡슐머신과 함께 캡슐 16개도 들어 있었다. 무려 25가지나 되는 네스프레소 커피캡슐 중에서 맛배기로 하나씩 마셔 보고 입맛에 맞는 캡슐로 주문하라는 의도일 것이다. 프린터를 사면 잉크까지 들어 있는 게 당연하지만, 전자제품을 살 때는 몇백원짜리 건전지도 별매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빨리 꺼내서 캡슐 커피 맛을 보고 싶다는 의욕만 앞섰다.
하지만 막상 캡슐머신을 꺼내고 보니 막막하기만 했다. 버튼만 두 개 있을 뿐인데 도통 사용법을 모르겠어서다. 급한대로 사용설명서를 펼쳐보았으나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사용설명서에는 사용 안내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었고 그저 그림만 그려져 있었다. 일반인이 아니라 문맹자를 위해 제작된 용도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림만 보고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면 좋겠는데 불행히도 초보자 눈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처음 사용할 때를 보자. 1. 설명서를 읽어보세요 2. 탱크에 물을 채우세요 3. 채웠던 물로 탱크를 행구세요. 4. 탱크를 캡슐머신에 장착하세요 5. 캡슐머신에 컵을 받치세요 6. 전기 코드를 꽂으세요 7. 에스프레소나 롱고 버튼 중 하나를 누르세요. 8. 불빛이 반짝이는 동안 25초 기다리세요. 9. 롱고 버튼을 누르세요. 10. 세 번 반복하세요.
말로 하면 쉬운 것을 그림으로만 그려놓으니 확신하지 못하고 이게 정말 이런 말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특히 25초 동안 대기하라는 8번의 그림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웠다. 25초를 카운트해서 기다린 후 버튼을 누르라는 말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25초 후에 깜빡임이 멈춘다는 말이었다. 그걸 모르고 25초를 세고 있었으니 참으로 멍청하면서도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용설명서 제작자의 의도는 전 세계 공통을 노렸을 것이다. 각 나라의 말로 사용설명서를 만들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겠지만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하나의 버전으로만 만들어도 된다는 잔머리 말이다. 그럼 제대로라도 그려놓던가 해야지 고대 벽화에서나 발견될 법한 모호한 그림들로 채워넣었으니 세계적인 회사의 21세기 제품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혹시 정말로 글자를 모르는 문맹인들을 위해서 만든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