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지 못하는 병이 하나 있다. 쌓아놓기만 하고 도무지 버리지 못하는 병이다. 병이 깊어갈수록 거실은 책으로 가득하게 된다. 박원순 서울시장처럼 거실을 도서관처럼 활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만한 공간이 나오지 않는다. 책장만 세 개나 되는대도 여전히 포화상태다. 아내가 남들처럼 제발 단순하게 꾸며놓고 살았으면 좋겠다며 하소연 할 정도다.
책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다 읽고 나중에 또 보기 위해 소장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읽지 못했으므로 나중에 읽기 위해서다. 솔직히 말하면 전자보다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 읽지도 않은 책을 버린다는 것은 최고급 한정식집에 들어가서 맛도 못보고 구경만 하다 나오는 격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껴안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지난해 초 이사하게 되면서 큰 맘 먹고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아왔던 책들을 골라서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는 스캔 서비스 업체에 의뢰해서 파일로 만들어 보았다. 비용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스캔 품질도 좋다면 웬만한 책들은 스캔본으로 만들고 책들은 버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차피 당장 볼 책이 아니라면 책장에 끼워놓는 것보다 파일로 만들어 보관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스캔 서비스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보낼 책들의 제목과 페이지수를 입력한 후 택배로 보내기만 하면 알아서 처리하고 웹디스크에 파일을 올려준다. 정해진 기간 안에 PDF 파일로 만들어진 스캔본을 다운로드 받기만 하면 끝이다. 가격은 300페이지까지 2,000원이었고 그 이상의 경우에는 추가 비용이 들었다. 200페이지를 기준으로 하는 다른 스캔 서비스 업체보다 훨씬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스캔 품질도 괜찮았다. 전문가의 손길로 후보정까지 해주는 듯 보였다. 가장 비싼 책은 632페이지짜리로 4,100원이었고 웬만한 책들은 2~3천원 내외였다. 21권에 들어간 비용이 53,600원이었으니 단순 계산으로 권당 2,552원인 셈이다(물론 택배비는 별도). 파일로 만들고 남은 책들은 돌려 받을 수도 있고 다시 제본을 요청할 수도 있으나 어차피 공간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으므로 쿨하게 버리기로 했다.
비교적 마음에 들기에 다른 책들도 의뢰하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저작권 문제로 스캔 서비스 업체들이 모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책을 본인이 스캔해서 본인만 사용하는 경우에만 허용되고 나머지는 불법이라는 말이었다. 음성적으로 또는 알음알음으로 하는 경우는 없지 않겠으나 공개적으로 도서 스캔 서비스를 하는 곳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사이 책은 더 쌓여갔고 버리지 못하는 불치병은 고쳐지지 않은채 시간만 흘러갔다. 이대로라면 책에 묻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다 직접 스캔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평소 자가 스캔에 회의적이었던 것은 스캐너의 부피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다. 집에도 사무실에도 그 정도 공간을 내줄 만한 여유가 없다는 핑게였다. 물론 초기 구입가격도 무시못할 부분이었다.
고민 끝에 구매하기로 결정한 모델이 후지쯔 스캔스냅(ScanSnap) iX500이었다. 최저가로 검색하면 598,000원에서 695,000원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 녀석이다. 가격이 다소 부담스러워 2~30만원대 제품도 알아봤지만 속도와 안정성, 그리고 스캔 품질 등 여러가지 면에서 iX500의 압승이었다. 양면 스캔에 최고 속도도 분당 25페이지를 자랑한다. 재단 시간보다 스캔 시간이 더 빠를 정도다(해상도를 높이거나 OCR 인식을 추가하면 시간이 늘어나기는 한다).
우려했던 사이즈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다. 가로 폭이 30cm도 안되는 29.2cm이고 폭도 15.9cm에 불과하며 높이도 16.8cm 정도다. 프린터보다도 작다고 할 수 있다. 책상 한쪽에 올려놓고 필요할 때마다 스캔할 수 있는 크다. 다만 스캔할 때 종이에서 먼지가 많이 날린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자동 급지 용량이 최고 50장 정도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로써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한 준비는 마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