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의 나들이였다. 친한 선배의 죽음이 초대한 자리라고 해도 시간 내서 온 김에 한때의 기억들을 더듬고 싶었다. 첫사랑의 감정도 다시 느끼고 싶었고, 오래전 선배들과 함께 갔었던 찻집도 들르고 싶었다. 과거에 대한 집착까지는 아니어도 그 사이의 변화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만큼 모든 것들이 변했겠지만, 추억은 영원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기억과 현실이 맞닿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선해 보였던 죽은 선배의 부인은 남편 잡은 몹쓸 년이 되어 있었고, 다정했던 첫사랑은 냉랭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젊은 시절 선배들과 어울렸던 전통찻집에서도 예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기저기 다녀보지만 그리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들만 따라다닐 뿐이었다. 내가 변한 것인지, 세상이 변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박해일 주연의 영화 ‘경주’는 이처럼 오랜만에 경주에 들른 한 남자의 복잡한 감정들을 그린 영화다. 감정은 복잡한 데 비해서 시간은 더디 흐른다. 이 영화의 치명적인 매력이면서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세월이 야속한 주인공 최현(박해일)의 복잡하고 공허한 감정을 충분히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지나치게 지루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탓이다.
‘죽음에 대한 향수. 찰나의 순간이 영겁의 세월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의 두려움 또는 그리움. 정신없는 영화들 사이에서 조용히 마음에 스며드는 몇 안 되는 감사한 영화. 박해일이었기에 왠지 모를 유쾌함.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따스한 시선’이라며 호평한 관객이 있는 반면 ‘무슨 소리 하는지 무식해서 모르겠어요 감독님이 이겼어요’라며 혹평한 관객도 있다.
관객들의 평점도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죽고 나면 모든 게 똥이 된다는 얘기를 아주 길고 느리고 아름답게 그린 영화’라거나 ‘매일 스쳐 지나간 바람은 언젠가 나에게 스쳐 간 바람이 아닌가?’라며 10점 만점을 준 관객도 있는 반면 ‘이 영화를 왜 찍었는지 궁금해서 끝까지 봤다’거나 ‘심오하고 우울하고 개연성 없고 이렇게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해’라면서 최하 평점을 준 관객도 있다.
이처럼 영화 ‘경주’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이 초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삶을 보고 싶어 했지만 감독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시간들은 역동적인 데 비해서 죽음 이후의 시간은 차분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권태로운 인생이라 해도 삶에는 수많은 변수와 자극요인이 존재하는는 이유에서다. 죽음 이후에는 죽음 그 자체라는 상수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은 고역에 가깝다. 연신 하품이 나오고 엉덩이가 들썩거려진다. 감겨오는 눈꺼풀을 참아내기도 버겁다. 그나마 영화관이라면 어쩌지 못하고 자리를 지킬 수도 있으나 VOD로 본다면 30분도 넘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끝까지 봐야만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영화다. 그 이전의 시간들이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마지막에서야 밝혀지기 때문이다.
끝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천년 고도 경주에 들른 한 남자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마지막을 지키고 나면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경주에서 최현은 삶의 시간을 걸어온 것이 아니라 죽음의 시간을 걸어왔고, 이 영화는 그 시간들을 증언하고 있다.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기에 보는 이들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경주’라는 지역이 삶과 죽음이 공존하기에 적절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밀양’처럼 중의적인 의미로 쓰이기에 다소 부족한 느낌이다. ‘밀양’은 경남의 어느 곳이라는 지역적 의미도 있으나 ‘Secret Sunshine’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경주’는 문화재 도시라는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을 하려거든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경주 (2013)
드라마 | 한국 | 145분 | 2014.06.12 개봉 | 감독 : 장률
출연 : 박해일(최현), 신민아(공윤희), 윤진서(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