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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그곳에서 그가 찾은 것은? 리스본행 야간열차 - Journeyman이 바라본 세상
그곳에서 그가 찾은 것은?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야간열차7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로 시작하는 짤막한 시가 있다. 왠지 공익광고에나 나올 법한 문구의 이 시는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말로 끝을 맺는다. 단 두 줄에 불과한 짧은 시이지만 울림은 그 이상이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둔탁한 무언가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연탄재만도 못한 존재였다니…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은 큰 사건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은 무엇인가로부터 자극을 받기도 한다.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감명 깊게 읽었다면 길거리에 널브러진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않는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평생토록 자신이 정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노교수가 모든 것을 팽개치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도록 만들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작은 사건에서 시작한다. 하나는 비 오는 날 다리 난간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 든 책이었다. 둘의 공통점은 포루투갈어(Portuguese)였다. 우연히 만난 여인은 포르투갈어가 모국어였고, 헌책방의 책도 포루투갈어로 쓰여진 포르투갈 작가의 책이었다.

‘미션'(The Mission, 1986)에서 성스러운 가브리엘 신부를 맡았고, ‘다이하드3′(Die Hard With A Vengeance, 1995)에서 테러리스트로 변신했으며, ‘데미지'(Fatale, Damage, 1992)에서 며느리와 위험한 사랑에 빠졌던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리스본행 야간열차'(Nachtzug nach Lissabon, Night Train to Lisbon, 2013)는 이처럼 평생토록 별다른 일탈 없이 살아왔던 어느 노인의 험난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그레고리우스 교수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들에 포커스를 맞춘다. 우연히 만난 여인, 우연히 만난 책, 우연히 만난 작가, 우연히 만난 작가의 여동생, 우연히 만난 모텔 주인, 우연히 만난 안경사, 우연히 만난 시민혁명군 등을 통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해진 길로만 걸어왔던 지난날에 대한 반항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만큼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중간중간에 나레이션으로 낭독되는 문장들은 다시 돌려보고 싶을 정도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영상으로 전해지다 보니 오래도록 간직하거나 되씹기는 쉽지 않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책을 다시 보고 싶어하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로는 크게 흥행하지 못했어도 책은 제법 베스트셀러로 대접받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책을 다시 펼쳐 드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권하고 싶지 않다. 영화와 책의 간극이 제법 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만난 여인이 두고 간 외투에서 책을 발견하고 그 책에 빠지게 되는 데 비해서 책에서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고른 책이었다. 영화에서는 그 책에 끼워진 차표를 전해주려고 기차역에 갔다가 얼떨결에 야간열차에 몸을 싣게 되지만 책에서는 많은 준비 끝에 리스본행을 결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책보다는 영화가 더 드라마틱하게 그려졌다고 본다. 어쨌거나 영화에서 그레고리우스는 강렬하게 빨아들이는 그 무엇에 의해 리스본으로 향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요절한 작가 프라두에게 이끌린다. 어쩌면 그레고리우스는 변혁의 시기에 짧고 뜨겁게 살아간 작가를 통해서 밋밋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지난날을 보상받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모든 것을 스위스 베른에 던져두고 포르투갈 리스본에 와서 찾은 것은 프라두의 가려진 인생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무도 프라두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여동생도 그랬고, 그의 혁명 동지도 그랬으며, 그의 연인도 그랬다. 모두들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그레고리우스만이 프라두가 남긴 인생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갈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노교수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영화이자 젊은 작가 프라두에 대한 영화다. 그러면서 프라두는 그레고리우스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말라고.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그레고리우스가 베른행 열차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물음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이가 얼마든 지금까지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니 말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Nachtzug nach Lissabon, Night Train to Lisbon, 2013)
미스터리,멜로/로맨스,스릴러 | 독일,스위스,포르투갈 | 111분 | 2014.06.05 개봉 | 감독 : 빌 어거스트
출연 : 제레미 아이언스(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 멜라니 로랑(에스테파니아), 잭 휴스턴(아마데우 프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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