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믿어도 되는 걸까?
가끔은 이런 부질없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죄를 짓고도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증거가 부족하다며 풀려나오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였는데도 고작 몇 년 정도의 징역형으로 죄값을 다 치렀다고 하기도 한다. 이게 정상적인 세상인가. 과연 이게 제대로 된 법치란 말인가.
지난 2013년 11월 서울고법에서는 지적장애가 있는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후 살해한 뒤 시체를 암매장한 중학생에게 원심대로 징역 8년을 선고하고 치료감호를 명한 적이 있다. 특수학교에 다니던 지적장애 3급인 11살 A양에게 공놀이하자며 빈 상가로 유인해 성폭행하고, A양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린다고 하자 인근 밭으로 데려가 둔기로 때려 살해한 뒤 암매장 한 15살 소년에 대한 죄값이었다.
이게 대한민국 법의 현주소다. 이러니 죽은 놈만 억울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시 재판부의 판결문이 더 가관이다. 재판부는 “장군은 과잉행동장애와 충동조절장애를 겪고 있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하지만, 죄질이 극도로 좋지 않다”며 “피해자와 유족이 겪은 고통이 감내하기 힘든 정도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하면 원심의 형은 너무 무겁거나 가볍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단다. 누구 말처럼 자기 자식이 그렇게 죽었어도 저런 말이 나올까 싶다.
오는 4월 10일 개봉 예정인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그처럼 딸을 잃고 살인자가 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엄마 없이 자라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딸을 비명에 잃었으니 그 무너지는 억장을 누군들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딸을 납치한 녀석들은 여고생이던 딸 아이에게 마약을 먹이고 성폭행한 후 죽은 채로 방치한 인간쓰레기들이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그게 최선이라고.
최선. 이 영화가 건네는 화두는 분노가 아니다. 과연 무엇이 최선인가 하는 것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과연 무엇인가 말이다. 죽은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무력감을 느끼던 아버지 이상현은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범인들에 대한 제보를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잠시 고민하게 된다. 경찰은 집에서 범인이 잡힐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는데 과연 그게 최선일까.
결국, 경찰에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그들을 찾아 움직이는 방법을 선택한다. 범인들을 단죄할 생각까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범인 PC에서 발견한 딸아이의 성폭행 동영상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게 되고, 야구방망이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게 된다. 그런다고 딸 아이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딸 아이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지만, 불쌍한 딸을 위해 아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 셈이다.
그러면서 이상현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고, 경찰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된다. 법의 잣대로는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보복이 되니 법의 모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흉악범이 자수하면 그 죄의 일부를 경감받게 되고 청소년이라면 상당 부분을 경감받게 된다. 앞의 기사처럼 소녀를 성폭행하고 죽인 흉악범이래도 고작 징역 8년이다. 이래도 법을 믿으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친숙한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보물을, 아쓰야는 저에게서 빼앗았습니다. 더구나 한 조각의 인간성조차 느낄 수 없는 광기로 가득 찬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그는 제 딸을 마치 짐승처럼, 아니 짐승보다 못한 고깃덩어리처럼 취급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딸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직접 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방황하는 칼날
스릴러, 범죄 | 한국 | 122분 | 2014.04.10 개봉 | 감독 : 이정호
출연 : 정재영(이상현), 이성민(장억관), 서준영(박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