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이유 없이 잘 해주는 데는 어떤 꿍꿍이가 있기 마련이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말이다. 물론 순수한 감정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저런 남자가 왜 나 같은 여자에게…’라는 의문이 든다면 거의 100%에 가깝다. 남자는 잠깐의 일탈이 필요할 뿐이다. 잠시 가던 길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가던 길로 계속 걸어갈 게 분명하다. 남자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배지만 여자는 늘 그 자리에 머무는 항구로 표현하는 것도 그래서다.
소녀티를 갓 벗은 스무 살 처녀 카타리나(알리시아 비칸데르)의 마음을 흔든 아담(사무엘 플로러)도 다르지 않다. 불우한 가정형편 탓에 일찍부터 함부로 몸을 굴려 왔기에 아담의 호의가 고맙고 신선하기는 했지만, 애당초 둘의 관계는 오래갈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이 차도 극복해야 하고 신분의 차이도 극복해야 하며 무엇보다 아담에게는 가정이 있었다. 아담에게는 그저 잠깐 동안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뿐이었다.
카타리나에게 아담은 모짜르트와 함께 왔다. 소음 같은 대중음악에서 쩔어 지내다 유튜브를 통해서 우연히 듣게 된 클래식에 빠져든 카타리나로서는 교향악단 지휘자인 아담의 존재가 위대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타리나에게는 동거 중인 남자친구 마티아스가 있었지만, 아담을 만난 후로는 그의 모든 것들이 한심해 보이기만 했다.
카타리나는 여지껏 아담처럼 자신을 조심스레 대해주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용기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말로 격려해 준 남자도 아담이 처음이었고 이제껏 닥치는 대로 살아왔던 자신을 지그시 바라봐 주는 것도 아담이 처음이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자신에게 철학적 이야기와 책을 선물해 준 사람도 아담이 유일했다. 그러니 어찌 아담에게 몸을 바치지 않을 수 있으랴.
하지만 카타리나는 알지 못했다. 아담이 자신의 욕정을 채운 후에는 예전과 달라지리라는 사실을 카타리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언제라도 예뻐해 주고 사랑해 주리라 믿었었다. 배설 욕구를 채우려고만 드는 다른 남자들과 다르리라 여겼었다. 그러나 그가 달라 보였던 것은 순전히 카타리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아담도 그저 남자일 뿐이었다. ‘남자는 다 그래’라던 심수봉의 노래처럼 말이다.
스웨덴 영화 ‘퓨어(Till Det Som Ar Vackert, Pure, 2010)’는 이처럼 나이와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위험한 사랑 이야기다. 시작은 짜릿했어도 그리 오래갈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어쨌든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카타리나가 몰랐던 것도 아니다. 다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감정에 충실하고 싶었을 뿐이다. 불안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이던 둘의 관계는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되고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여자의 순정을 짓밟은 댓가라고 하겠다.
여자들은 흔히 남자를 도둑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내 남자는 아니기를 바라는 모순된 감정을 안고 살아간다. 카타리나가 아담을 다른 남자와 다르리라 기대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랬기에 그를 잃은 상실감은 물론 그를 향한 분노 역시 더욱 크게 달아올랐으리라. 더구나 이제 스물을 갓 넘긴 카타리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자 모욕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영화는 전편에 흐르는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에 빠져들게 만드는 영화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으로 시작해서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 OST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착각하게 만든다. 이 영화를 보면서 아마데우스의 OST가 다시금 듣고 싶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지쳤다면 스무 살 소녀의 대담한 반란을 그린 영화 퓨어로 위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퓨어(Till Det Som Ar Vackert, Pure, 2010)
드라마 | 스웨덴 | 98분 | 2013.06.20 개봉 | 감독 : 리자 랑세트
출연 : 알리시아 비칸데르(카타리나), 사무엘 플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