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가 뭔가 남겨야 한다는 강박증이다. 이러한 습성은 영화라고 예외는 아니다. 보는 내내 깔깔대고 웃었어도 보고 나서 기억에 남는 게 없으면 잘 만든 영화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뭔가 남아야 제대로 만든 영화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 특성을 이용하고픈 사람들은 조폭영화에도 눈물을 끼워 넣으려 하고 코믹영화에서도 콧물을 빼내려고 든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Snowpiercer, 2013)’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어느 평론가는 영화를 보면서 뭔가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영화를 보면서 뭔가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재미없어할 영화라는 말이 되는데, 그럼 이 영화를 재미없게 본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스크린만 쳐다보다 나온 사람에 속한다는 말인가. 갑자기 비위가 상하려고 든다.
이 영화에 대해 혹평하는 사람들은 이런 얼토당토않은 찬사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장황하게 늘어놓는 내용들을 보면 ‘꿈보다 해몽’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같은 영화를 보고 그런 해석을 유추한 것도 대단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꿰어맞춘 듯한 ‘억지 춘향’식의 해석도 우려되는 것이다. 봉준호라는 이름이 빠졌어도 그런 해석과 찬사가 가능했을지 묻고 싶기도 하고.
모두가 인정하듯이 영화 ‘설국열차’는 계급투쟁을 그리고 있다. 꼬리칸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사람들과 그런 꼬리칸과 달리 똑같은 기차를 타고 있으면서도 호의호식하며 살고있는 앞칸과의 충돌이 주된 내용이다. 그러한 주제의식을 극대화하기 위해 폭동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자비한 살육을 비교적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자고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불가피한 법이다. 일명 기브 앤 테이크다. 다만 그 희생의 규모가 얻고자 하는 것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다면 하지 아니한 만 못하기 마련이다. 커티스가 주도한 폭동은 지난 18년간에 있었던 그 어떤 폭동보다 성공적이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잃은 것도 적지 않았다. 과연 커티스의 혁명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오락적인 요소를 적당히 버무린 영화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보니 무리수는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먼저 온난화와 그로 인해 발생한 빙하기로 인류가 멸망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는 전제가 빠져있다 보니 쉬지 않고 달리는 열차와 그 열차에 타고 있는 구성원들의 정체에 대해서 좀처럼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또한, 꼬리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무임승차꾼들로 표현하면서 앞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없다. 18년을 달려왔고 앞으로 얼마를 더 달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앞칸 사람들은 어떤 자격에서 그런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윌 포드의 일가친척이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설국열차를 제작하는데 투자한 사람들일까. 그도 아니면 추첨으로 결정했을라나.
물론 열차라는 공간을 지구의 축소판으로 본다면 앞칸 승객들은 부모 잘 만나서 이유 없이 잘 사는 한량들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다수의 고통과 희생은 외면한 채 환락을 누리며 사는 부류들. 꼬리칸이야 서로를 잡아먹든 말든 상관없이 인류가 멸망한 후에도 배 두들기며 여유롭게 살다 지겨워지면 마약에 빠져 흥청망청 대는 존재들. 불공평의 대표적인 상징들인 셈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다. 인류가 멸망한 후에도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기차 마니아 또는 기술자에 불과한 윌 포트를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묘사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열차가 지구의 축소판이라면 신적인 존재가 필요하기도 하겠지만, 그의 느닷없는 등장은 꿰어맞추기의 결정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가상 세계인 매트릭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해라도 되겠지만.
그러다 보니 이 영화에 대한 해석 자체가 무리일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저 오락영화로 보고 말아야지 이런저런 의미를 갖다 붙이게 되면 정말 꿈보다 해몽이 되겠다는 생각에서다. ‘디스트릭트 9(District 9, 2009)’에서는 지구인에게 멸시당하는 외계인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차별받는 흑인으로 이해할 경우 그 주제의식이 더욱 분명해 지는 데 비해서 이 영화는 그렇지가 못하다.
또한, 다른 캐릭터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보안 기술자 남궁민수 또는 냄 궁민수의 존재도 불만스럽다. 한국 배우를 은근슬쩍 끼워 넣는 것까지야 이해해 주겠지만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영어도 할 줄 모르는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도대체 그가 왜 열차를 세우려고 하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한다는 소신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바깥 환경에 대한 고려도 없이 무조건 기차를 세운다는 것은 지나치게 무책임하지 않은가.
어쨌든 커티스가 일으킨 투쟁의 진실이 밝혀지고 영원히 달릴 것만 같았던 기차는 멈춰 선다. 그리고 그 아비규환 중에서도 기적처럼 멀쩡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발견한 것은 희망일까 아니면 절망일까. 기차는 계속 달렸어야 할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멈추는 게 날까. 커티스는 지도자의 길을 받아들였어야 할까 아니면 거절하는 게 맞을까. 다시 말하지만, 봉준호라는 이름이 빠졌어도 그토록 과도한 해석과 찬사가 가능했을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그게 봉준호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의 의미일런지도 모르지만.
설국열차(Snowpiercer, 2013)
SF, 액션, 드라마 | 한국 | 125분 | 2013.08.01 개봉 | 감독 : 봉준호
출연 : 크리스 에반스(커티스), 송강호(남궁민수), 에드 해리스(윌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