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에 대한 찬사가 대단할수록 그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기대도 커지기 마련이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와 함께 불길함도 같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껏 달아오른 기대치를 충족시킨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탓이다. 어쩌면 이미 배가 부른 상태에서 잔칫상을 받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상태에서는 제아무리 별난 요리라 해도 맛을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에 대해서도 그렇다.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모두들 한결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고 400쪽이 넘는 장편 소설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는 서평이 대부분이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데 이어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것일까? 책에 대해서도 궁금했지만, 영화에 대한 호기심도 작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 포스터에는 ‘전 세계를 사로잡은 위대한 이야기!’라는 홍보문구까지 곁들여 있었다. 원작의 내용도 모르고 영화 예고편도 접해보지 못했어도 앞에서 말한 대로 ‘썩어도 준치’일 거라는 생각이 앞서게 만들었다. 흥미진진한 내용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감동 어린 꿈과 희망을 엿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앞섰다. 2013년을 맞이하는 첫날부터 극장으로 향했던 이유였다.
그런 기대는 영화의 오프닝을 보면서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동물들로 채워진 타이틀은 신비롭기까지 했고 그 동물들의 움직임과 함께 변신하는 타이틀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령 침팬지가 나무를 탈 때 타이틀에 나타난 이름 중의 한 글자도 같이 움직이는 식이다. 더구나 글자가 동물들 앞에 나타하지 않고 동물들 뒤로 가려진다는 것도 신선했다. 2D지만 마치 3D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듣던 데로 스토리는 잘 짜여져 있는 듯했다. 파이가 힌두교에 이어 천주교와 이슬람교까지 받아들이는 과정과 이름 때문에 오줌싸개라고 놀림받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파이라는 별칭을 만들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코믹하게 그려져 있기도 했다. 이후의 전개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런지는 알 수 없어도 초반의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기대 이상이라고 생각됐었다.
하지만 문제는 파이가 자라면서부터다. 어린 시절에 비해서 파이의 생활이 그다지 재밌게 그려지지 못했고 특히 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캐나다로 향하던 일본국적의 화물선이 난파된 이후에는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정처없는 일상이 펼쳐지기 시작하면서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물론 작은 구명보트에 함께 타게 된 벵갈호랑이와의 대치라는 긴장된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리 실감 나게 그려지지 않은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극한 환경에서 얻게 되는 인간과 맹수의 교감 정도가 주제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난파된 상황이니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원작은 어떤지 몰라도 이 영화는 그러한 주제를 내세우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마치 소년판 ‘노인과 바다’인 듯 혼자서 고군분투하고,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 2000)’의 톰 행크스처럼 심정적으로만 호랑이에게 의지할 뿐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왜 사서 고생일까라는 생각이 앞서게 만든다. 이는 마치 ‘개그콘서트’의 ‘거지의 품격’에서 허경환이 김지민에게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짐승의 목숨을 아껴주려는 마음은 기특하나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호랑이를 구해준다는 부분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이야기’인 건지는 몰라도.
이 영화의 원작자인 얀 마텔이 “이 작품이 영화화되는 상상을 해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영화화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책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가 소설이기에 가능했던 상상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안 감독을 만나고 완전히 생각이 달라졌다”라는 소감을 나타냈듯이 이 영화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화면 가득 펼쳐진 장면들이 압권이다. 어쩌면 스토리를 읽는 맛보다 화면을 보는 맛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바다에서 사투를 벌였던 227일이라는 시간이 절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생이 많았다라는 생 보다는 그저 잠깐의 소풍을 다녀왔거나 또는 한나절의 낮잠에서 꿈을 꾼 느낌이 들게 만드는 까닭에서다. 진수성찬으로 가득하더래도 맛이 담보되어야지 빛깔만 좋을 뿐이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모험, 드라마 | 미국 | 126분 | 2013.01.01 개봉 | 감독 : 이안
출연 : 수라즈 샤르마(소년 파이 파텔), 이르판 칸(어른 파이 파텔), 라프 스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