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꼬시기만 해서는 진정한 바람둥이라고 할 수 없다. 단물 빠진 껌을 뱉어내듯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진정한 바람둥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에 이끌릴 경우 한 여자에게 정착해야 하고 그다음은 메어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떨쳐내야만 한다.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다면 필히 대형 사고로 이어질 게 뻔하다.
바람둥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철칙이 있다. 돌아서서 곧바로 잊을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여자로 하여금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자기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잠시 데리고 놀기 위해서라거나 이용해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사랑해서였다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다.
낭만의 섬 하와이에서 수족관 수의사로 일하고 있는 헨리 로스도 그런 난봉꾼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노리는 여자들은 주로 하와이로 놀러 온 여행자들로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쉽게 사귈 수 있고 그보다 더 쉽게 헤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잠시동안만 방문한 여자들이니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고 떠나보내면 그뿐이었다. 책임질 필요도 없고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다. 내일이면 새로운 여자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런 헨리에게 이상적인 여인이 나타났다. 하루를 마음껏 즐긴 헨리가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거짓말을 지어내거나 거짓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휘트모어. 1년 전 교통사고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녀는 오직 하루만 기억할 뿐이었다. 둘 사이에 내일은 없었다.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었다. 바람둥이에게 그처럼 좋은 조건도 없을 텐데 헨리는 오히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서 가슴이 아려옴을 느낀다.
수많은 여자들로 하여금 피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그였지만 이제는 자신이 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오늘의 만남을 내일로 계속 이어지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난잡하게 살아온 그에게 마치 천벌이라도 내린듯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자리 잡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토록 가슴 아픈 일인 줄 처음 알게 된 터였다.
영화 ‘ET’의 꼬마 아가씨로 유명한 드류 베리모어 주연의 ‘첫 키스만 50번째(50 First Dates, 2004)’는 이처럼 엇갈리는 두 남녀의 모습을 통해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오랜 난봉꾼 생활을 청산하고 한 여자에게만 정착하고자 하는 남자 헨리 로스(아담 샌들러)와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기억이 멈춰버린 여자 루시 휘트모어(드류 베리모어)를 통해서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첫 키스만 50번째’로 번역된 이 영화의 원제목은 ’50번의 첫 번째 데이트’라는 의미의 ”50 First Dates’이다. 하루 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루시와의 데이트는 늘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그런 루시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남기게 하기위한 헨리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눈물겹지만, 상당히 흥미롭게 펼쳐진다. 어떻게 하면 여자로 하여금 떨어지게 할까 고심하던 그가 이제는 어떻게 하면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또한, 평범하지 않은 둘의 관계가 어디까지 이어지게 될지, 루시의 단기 기억상실증은 고쳐지게 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듯이 이 영화도 기대를 져버리지야 않지만, 결말 부분에서 반전이 있다는 점은 다소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긴 드류 베리모어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첫 키스만 50번째(50 First Dates, 2004)
멜로/애정/로맨스, 코미디 | 미국 | 99분 | 2004.04.15 개봉 | 감독 : 피터 시걸
주연 : 아담 샌들러(헨리 로스), 드류 베리모어(루시 휘트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