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는 좋은 편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평생 다른 사람을 위해 뛰어야만 했던 보조 선수라는 운명의 굴레는 충분히 영화로 만들어질만한 소재로 보였다. 게다가 필연적으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장면들도 들어있을 게 분명하다. 괜찮은 영화의 조건을 두루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2012년 1월 18일 개봉한 영화의 누적관객수는 463,587명에 불과했다. 같은 날 동시에 개봉했던 김정민, 엄정화 주연의 ‘댄싱퀸'(4,010,624명)은 물론 안성기 주연의 ‘부러진 화살'(3,425,537명)보다 훨씬 못 미치는 저조한 성적이다. 그나마 엄태웅, 정려원 주연의 ‘네버엔딩 스토리'(278,324명)보다 낫다는데 위안을 삼을 뿐이다. 연기 본좌로 통하는 김명민 주연의 ‘페이스 메이커’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김명민은 마라톤 우승 후보 선수의 기록단축을 위해 전략적으로 선두에서 달리는 보조 선수 역할을 맡았다. 선수의 페이스를 조절해 주는 일명 ‘페이스 메이커’다. 주연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마라톤을 준비한다는 설정은 각본 있는 드라마로서 충분히 가치 있어 보이는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바로 스포츠 영화라는 점이다. 지난 2005년 자폐아동의 마라톤 성장기를 그렸던 영화 ‘말아톤’이 가족영화로 흥행에 성공했고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이겨내고 올림픽에서 당당히 메달을 따냈던 국가대표 핸드볼 여자선수단의 이야기를 그렸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2008)이 화제가 되기는 했어도 스포츠 영화는 여전히 흥행에 불리한 쟝르였다.
그러한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려면 필연적으로 휴머니즘을 가미해야만 한다. 한국 프로야구사에 빛나는 15이닝 완투 무승부 대결을 펼쳤던 최동원과 선동열의 이야기를 그린 ‘퍼펙트 게임'(2011)에서는 가공의 인물 박만석의 이야기를 꾸며 넣었고 동계스포츠 불모지에서 꽃을 피운 ‘국가대표'(2009)에서는 해외입양아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페이스 메이커’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다. 촉망받던 마라톤 선수 주만호가 페이스 메이커로 전락하게 된 사연과 평생 남을 위해 달려야 했던 이유 등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면서 그저 그런 평범한 스토리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특히 동생을 위해 그러한 슬픈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부분은 관객이 이해하기도 전에 스쳐 가듯 지나가고 만다. 대단한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그런대로 볼만하다. 아니 망작이라는 소문만 듣고 보면 오히려 명작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뻔한 억지설정은 영화의 감동을 갉아먹고 있었다. 태릉선수촌의 미녀 운동선수가 어리숙한 노총각에게 필요 이상의 호감을 보이는 거나 마지막 부분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설정은 영화가 아니라 만화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하다. 휴머니즘은 생략한 채 만화적인 상상으로만 채워넣은 결과다.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또 다른 이유는 2012 런던올림픽 때문이다.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올림픽 시즌을 겨냥해 만든 영화이지만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도 전에 영화가 먼저 개봉했기에 올림픽에 대한 바람몰이가 이루어지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빨랐다. 차라리 올림픽이 시작된 최근에 개봉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싶다. 그래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개봉 시기에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다.
2012 런던 올림픽이 시작되면서 땀과 눈물이 교차하고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는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수영 남자 자유형 400M에서 박태환은 운영진의 이해할 수 없는 판정으로 실격이라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고 유도 남자 66kg 이하급에 출전했던 조준호는 3:0의 판정승을 거두고도 0:3으로 번복되며 승리를 강탈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의가 받아들여진 박태환은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패자부활전으로 밀렸던 조준호는 동메달을 따냈다.
박태환은 실격이라는 어이없는 판정으로 흔들릴 수 있었지만 차분히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갔고 조준호 또한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혼란스러웠을 텐데도 당당히 자신의 힘으로 메달을 따내고야 말았다. 역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의지의 한국인다운 모습이었다. 이 처럼 스포츠는 경기장의 선수뿐만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까지도 짜릿한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이 처럼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다. 불굴의 의지와 인내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감동의 대서사시다. 그에 비해 영화는 각본이 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 억지 설정을 끼워 넣기도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감동이 아니라 비난만 사게 된다. 감동이란 억지로 쥐어 짠다고 나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감독과 작가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 2012)
드라마한국 | 124분 | 2012.01.18 개봉 | 감독 : 김달중
주연 : 김명민(주만호), 안성기(박성일), 고아라(유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