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의 전도유망한 패션 사진작가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에게 남은 날이라고는 통상적으로 3개월 정도지만 1년이 될 수도 있고 1개월이 될 수도 있다.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효과가 있다는 보장도 없고 완치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저 5% 내외의 확률에만 기댈 뿐이다. 자신의 죽을 날을 미리 알게 된 이 청년에게 남은 인생은 축복이 될까 아니면 저주가 될까?
아마도 하루하루 매일마다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기간이 공포의 날들이 될 것이고 죽기 전에 자신의 삶을 미리 정리할 수 있는 날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뜻깊은 시간들이 될 것이다.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망친다고 도망갈 수도 없는 일이기에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고 쿨하게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판단이리라.
패션 화보업계에서 잘 나가는 사진작가였던 로맹은 늘씬한 모델들과 작업하던 중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힘없이 쓰러지고 만다. 줄담배를 피워대던 그가 우려했던 질병은 후천성 면역결핍증, 즉 에이즈(AIDS)였다. 남자 친구와 동거하고 동성연애를 하면서 언젠가 자신에게도 끔찍한 천형이 내리지나 않을까 염려했던 듯하다. 남자를 사랑한 댓가라고나 할까.
다행히(?) 로맹이 걸린 병은 에이즈가 아니었으나 폐암이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된 상황. 더구나 손을 쓰기에도 너무 늦은 말기였다. 담당 주치의는 항암치료를 권해보지만, 그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다 한들 어차피 오래지 않아 죽게 되리라는걸 숨기지 않는 게 오히려 환자를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혼란스럽기만 했던 로맹은 희미한 확률에 매달리기보다 남은 시간을 보다 확실한 일에 쓰기로 결심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에게 남은 인생을 정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가족을 비롯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을 알려야 하나 망설이다 끝내 말하지 못했고 오히려 여동생에게 못된 말로 도발할 뿐이었다. 동거 중인 남자친구에게도 사랑을 고백하고 사실대로 밝히는 대신 매몰차게 대해서 둘의 관계를 파탄 내기에 이른다.
그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그의 주치의와 멀리 시골에 사는 할머니뿐이다. 할머니라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줄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에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은 떠나지만 그 대신 작은 생명을 남기는 일이었다. 마치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이.
프랑스 영화 ‘타임 투 리브(Time To Leave, 2005)’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주인공 로맹은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고서 그 사실에 절망하기보다는 희망을 찾으면서 처절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니라 은은하고 잔잔하게 받아들인다. 이승을 떠나는 마지막 모습에 정답이 있을 수 없지만,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 떠나는 것이다.
영화는 나름대로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바닷가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장면은 뭉클함마저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남자끼리와의 정사 장면뿐만 아니라 불임 부부와 주인공의 혼음, 일명 쓰리썸(Threesome) 장면까지도 농도짙게 묘사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 그러한 장면이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힘겨운 게 사실이다. 가족이 아닌 부부 또는 연인만 같이 보시기를 권한다.
타임 투 리브(Le Temps Qui Reste, , 2005)
드라마 | 프랑스 | 80분 | 2006.02.09 개봉 | 감독 : 프랑소와 오종
주연 : 멜비 푸포(로맹), 크리스찬 센게왈드(사샤),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