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중역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는 누구일까? 물론 열이면 열, 모두가 설경구라고 답할 것이 뻔하다. 설경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강철중이 된다는 것은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아닌 다른 배우가 멀더라고 불리는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재앙은 이규화가 아닌 다른 성우가 멀더의 목소리를 맡는다는 것이다. 멀더는 꼭 데이비드 듀코브니여야 하고 그 목소리는 반드시 이규화여야 하는 것은 그들만이 멀더라 불릴 자격이 있기 때문이고 오직 그들만을 멀더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강철중은 반드시 설경구여야 한다. 설경구가 없는 강철중은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해서도 안 되는 절대가치인 것이다.
그가 돌아왔다. 강동서 강력반 강철중.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대한민국 모두가 썩었어도 그만은 언제나 그자리에서 나쁜 놈을 잡아줄 것만 같은 오직 한사람. 그가 돌아온 것이다. 반가웠다. 그의 능글맞은 표정이 그리웠고 그가 내뱉는 걸쭉한 욕설이 그립던 차에 들려온 그의 귀환 소식은 무척 반가운 메시지였다. 어떤 면에서는 인디아나 존스의 컴백보다 더 기다려지는 소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왠지 시작부터 강철중이 강철중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뭐라 딱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강철중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강철중 행세라도 하는 듯 느껴졌다. 강철중역을 맡은 설경구의 이미지가 그동안 너무 순화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몇 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 자신이 가두어놓은 강철중의 이미지 때문일까. 세월을 따라 인디아나 존스가 변했듯이 강철중도 변한 것일 테고 어쩌면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후편을 통해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종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이런저런 사정을 다 감안하더라도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었다. 결국, 영화를 보는 내내 뭔가 어색하고 불편한 점을 느껴야만 했던 이유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에야 비로소 확실해진다.
그렇다. ‘강우석 영화’로만 알고 있었던 강철중이 바로 ‘장진의 영화’였던 것이다. 코미디 작가로 시작해서 희곡작가와 연극연출에 이어 충무로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이미 중견 감독으로 대우받는 장진. 그가 바로 이 영화의 대본을 맡고 있었다. ‘웰컴 투 동막골’이나 ‘박수칠 때 떠나라’ 등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들은 작품성에도 호평을 받고 대중성도 인정받고 있었지만, 그의 영화에 몰입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일정한 패턴 때문이다.
코미디 작가 출신으로서 웃겨야 한다는 사명감과 웃기기만 해서는 기억될 수 없으니 울려야 한다는 강박증이 한데 어우러지는 영화는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전개되곤 한다. 굳이 웃기지 않아도 되는데 일부러 웃기려 하고 굳이 울리지 않아도 되는데 억지로 울리려고 한다.
장진은 강철중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강철중이 설경구가 아닌 차승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장진의 강철중은 설경구가 아니라 차승원이었어야 했다. 강철중을 이렇게 망가트릴 바에야 설경구가 아닌 차승원을 데리고 영화를 찍었어야 했다. 그래야만 웃다가 울다가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결코 웃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2시간이 넘도록 영화를 본 후 마지막 엔딩 크레딧을 보다가 이런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강철중이 강철중다워야 강철중이지 … 영화 강철중에 강철중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