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없는 드라마라는 말은 스포츠를 이야기할때 흔히 쓰게되는 표현이다.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정신력으로 강자를 무너뜨릴 때에도 그렇고 최약체의 전력으로 평가받고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경기에 임하는 투혼에서도 그런 감동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각본이 있었다해도 그처럼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지는 못할런지도 모른다.
1987년 5월 16일도 그랬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두 명의 투수가 맞대결을 펼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부산과 광주, 영남과 호남, 롯데와 부산이라는 라이벌 요소에 최동원과 성동열이라는 불세출의 두 영웅이 만나면서 전설은 시작된다. 경기시간 총 4시간 56분. 9회의 정규이닝을 마치고도 승부를 가리지못해 연장 15회까지 이어졌던 경기.
여기까지였다면 최동원과 선동열의 맞대결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경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날의 경기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은 그 15회까지 원정팀 선동열의 투구수는 232개였고 최동원도 209개나 던졌던 까닭에서다. 둘이 던진 공을 합치면 무려 441개에 이른다. 승자와 패자도 없는 경기였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15회까지 투혼을 발휘했던 경기였기에 야구팬들은 그날을 감동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때 손석희가 진행했던 MBC 마감뉴스에서는 그날의 경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선동열과 최동원의 황금팔 대결은 연장 15회까지 가는 5시간의 접전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했습니다. 롯데는 해태와의 부산 경기에서 2회말 김용철의 포볼과 김민호, 정구선의 연속 안타로 만든 무사 만루에서 김용운의 내야 땅볼과 야수선택으로 두점을 선취해 기세를 올렸습니다.”
“추격에 나선 해태는 3회초 서정환의 중전 적시타로 한점을 따라붙고 패색이 짙어가던 9회초 다시 대타 김일환의 우전 적시타로 동점을 만든 후 경기를 연장 15회까지 끌고 갔으나 결국 2:2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최동원은 바깥쪽 꽉찬 직구와 커브를 주무기로 한 노려한 피칭으로 산발 11안타 탈삼진 8개로 호투했고 선동열을 슬라이더와 스크류볼 등 힘차고 다양한 구질을 구사하며 역시 산발 7안타 탈삼진 10개로 구위를 과시했습니다.”
영화 ‘퍼펙트 게임’은 한국 프로야구 30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두명의 투수에 대한 내용이자 1987년 5월 16일의 경기를 담은 영화이다. 특히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는 장효조의 뒤를 이어 지난 9월 타계했던 최동원을 그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스포츠 관련 영화들이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적지않은 관심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각본없는 드라마의 위대함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오히려 그날의 감동을 퇴색시키고 있다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스포츠 영화의 잇따른 흥행실패에 대한 부담이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최동원과 선동열이라는 인물과 그날의 경기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웃기고 울리는데 촛점을 맞추려다 보니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당연히 최동원 역의 조승우와 선동열 역의 양동근이 주연으로 보여야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일간스포츠 신문기자 김서형 역의 최정원이나 해태 불펜 포수 박만수 역의 마동석이 오히려 주인공처럼 보일 정도다. 이 말은 곧 영화의 스토리가 중심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말과 같다고 하겠다.
스포츠 영화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스포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충분히 즐길 수 없다는 핸디캡 때문이다. 영화 ‘퍼펙트 게임’은 야구를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지나치다 보니 두 영웅의 만남과 그들의 피와 땀이라는 키워드 보다 인간승리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면서 야구기자가된 김서형이나 만년 후보 박만수를 전면에 내세웠던 것도 그러한 계산의 결과였다.
그러다보니 위대한 전설은 그저 장식품에 불과할 정도로 초라하게 다루고 있다. 야구팬들이 최동원이라는 이름을 왜 위대한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선동열이라는 이름이 왜 한국 프로야구에서 빛나는 것인지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고 그날의 경기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은채 그저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마무리 지을 뿐이다. 야구팬이 아니라면 즐길 수 있는 영화일지 몰라도 야구팬으로서는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