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겼다. 그와 함께 단란했던 가정도 깨지고 말았다. 태어나자마자 기구한 인생을 짊어져야 했던 여인은 평생을 불행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녀에게 있어 자상한 남편과 토끼 같은 자녀와 함께 꾸려가는 단란한 가정은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국권을 빼앗긴 나라에서 태어난 게 죄라면 죄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 두 여인이 있다. 하나는 조선의 마지막 왕조에서 태어난 귀하신 공주님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나라에서 태어난 평범한 백성의 자식이었다. 모든 생명은 고귀하기 마련이지만 신분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시기에 같은 여자로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이목은 공주에게로 향할 뿐이었다. 삶의 무게도 다르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 ‘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황녀’를 읽으면서 불편한 기운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은 한 여자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덕혜옹주’라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녀 곁을 맴도는 ‘복순이’라는 인물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똑같이 불행한 시대를 살았고 똑같이 기구한 운명을 감내해야 했으나 두 여인을 향한 시선은 정반대였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두 여인은 모두 국권을 잃은 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판박이처럼 똑같이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소설은 복순이의 불행은 못 본채하고 덕혜옹주의 불행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 덕혜옹주의 불행에는 안타까워하는 대신 복순이의 불행에는 나라 잃은 백성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명백한 이율배반이다.
국권을 빼앗기기는 했어도 덕혜옹주는 왕실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자랐다. 고종이 나이 60에 얻은 늦둥이였기에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이름도 없어서 아기라 불려야 했지만 큰 고충이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로 일본식 교육을 받는 것도 스스로에게는 문제라 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복순은 잃은 게 너무 많았다. 그 아비 허승은 나라의 국권을 찾고자 처자를 버리고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딸아이에게 하늘에서 보낸 복덩이 계집애라는 의미로 복순이라 이름을 붙여주었으나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허승이 외지로 떠도는 통에 복순이 역시 아비의 정을 느껴볼 기회조차 없었다.
복순이라는 인물은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나 내가 복순이라는 인물에 집착하는 것은 사람의 불행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에서다. 귀하신 몸이라 특별히 더 안타깝고 천한 신분이라 덜 안타까울 수는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렵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앞서 일본인 작가인 다고 기치로가 오랜 세월에 걸쳐 덕혜옹주를 재조명해왔고 이 소설이 화제가 된 후에는 손예진 주연의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는 심한 왜곡 문제가 불거지면서 역사영화가 아니라 판타지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흥행을 위해서라면 영혼까지도 팔아먹을 장삿속이 만들어낸 결과다.
데레사
2017년 2월 6일 at 7:41 오전
영화를 안 봤어요.
언제나 영화는 주인공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런가 봅니다.
솔직히 고생이야 민초들이 더 했을텐데요.
저는 댓글을 바로 올라 오게끔 토론으로 들어가서 고쳐봤는데도
안되네요. 이것도 솜씨 부족인가 봐요. ㅎ
journeyman
2017년 2월 8일 at 2:46 오후
저도 소설만 읽어보고 영화는 보지도 않았습니다.
역사는 팩트가 생명인데 팩션이라는 미명하에 판타지로 만드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