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스테이션2를 처음 샀을 때 굳이 메모리 카드가 필요할까 싶었다. 더구나 플레이스테이션2에 들어가는 메모리 카드는 용량이 적은 데다 가격은 비싸고 무엇보다도 호환성이 떨어지기에 다른 용도로는 쓸 수도 없었다. 게임기에다, 게임 소프트웨어에다, 메모리 카드까지 사려니 허리가 휘청했다. 게임기와 소프트웨어야 없으면 게임 자체를 할 수 없으니 반드시 필요하지만, 메모리 카드는 그렇지도 않으니 꼭 사야만 하나 싶었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2로 게임을 하면서 발견한 사실 중에 하나는 메모리 카드가 반드시 필요하구나 하는 점이었다. 메모리 카드가 없으면 게임을 하다 중단하게 될 경우 그 지점을 저장할 수 없으니 매번 처음부터 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가령 월드컵 축구 게임을 한다면 결승까지 가지 못하고 중단할 경우 조별리그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선수 구성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만 한다. 아주 죽을 맛이다.
이는 어릴 적 동네 전자오락실에서 게임을 할 때도 해봤던 경험이었다. 50원을 넣고 게임을 하다가 끝났을 경우 Continue 숫자가 0일 되기 전에 동전을 투입해야만 이어서 할 수가 있었다. 더 이상 50원짜리가 없거나 설령, 50원짜리가 잔뜩 있더래도 시한 내에 투입하지 못하면 그대로 종료되고 만다. 요즘 하는 얘기로 아무리 만랩을 찍었어도 말짱 꽝이요, 도루묵이 되는 것이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2014)는 그런 게임이 생각나게 만드는 영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동전은 끊임없이 넣되 번번이 타이밍을 놓치고야 마는 전자오락과 같다고 하겠다. 플레이는 계속되지만,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플레이어의 능력치가 쌓인다는 점은 저장되지 않고 초기화되는 게임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승산 없는 전투에 투입된 주인공 빌 케이지는 외계인과의 접촉으로 같은 시간대를 반복해서 겪는 타임 루프에 갇히게 된다. 중령이지만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전쟁터로 보내지고 그의 악몽 같은 현실은 매번 그 상황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런 과정을 무수히 거치면서 어리버리한 범생이 장교가 능숙한 지옥의 전사로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된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타임슬립(Time-Slip)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단순히 과거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시점에서 다시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보다는 타임 루프(Time-Loop)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매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경험으로 능력치를 올려가는 모습이 무척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초기화를 위해 주인공을 일부러 죽이거나 섹스를 통해서 능력을 나눠 갖자고 제안하는 부분도 재미있는 대목이다.
타임 루프 영화로는 빌 머레이와 앤디 맥도웰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3)이 대표적이다. 특집 방송을 위해 작은 마을로 취재 나갔던 TV 기상 통보관 필 코너스는 자고 일어나면 매번 2월 2일(성촉절, Groundhog Day: 경칩)로 돌아가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절망 속에 살아가던 그는 사랑의 참 의미를 깨달은 후에는 더 좋은 남자가 되어 간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답게 정신없이 몰아치는 장면들로 충분히 재미를 즐길 수 있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반 이후부터는 다소 느슨하게 전개되기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고 특히 후반부에서는 서둘러 결말짓기 위한 무리수가 눈에 띄기도 한다. 오메가를 지키고 있는 병력이 무척 허술하다는 점도 그렇고, 엄청난 공격력을 가졌다는 알파의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무척 놀랄 지경이었다.
외계인과 좀비가 등장하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가급적 피하는 편인데, 그런 편견을 불식시켜 준 영화가 외계인 영화로는 ‘배틀쉽'(Battleship, 2012)이었고 좀비 영화로는 ‘월드워 Z'(World War Z, 2013)였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도 그런 기대로 영화관을 찾았던 것이었는데, 좀 많이 아쉬운 영화였다. 적응하지 못한 아내는 숙면을 취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