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마음은 그 자리에
동짓날 저녁쯤으로 생각된다. 요즘은 일찍 날이 저물어 5시를 좀 지나서 산책을 시작하면 이내 날이 저물어 달이 뜬다.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문득 올려다보니 아름드리 해송의 실루엣 사이에 달이 걸려 있다. 어느덧 또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서 그 자리에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금강경의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이라는 구절의 의미가 너무도 또렷이 다가왔다.
지구의 공전 궤도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언제나 지금뿐이고 시간이라는 것은 단지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의 한계 때문에 흐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뿐이며 단지 색이 시공에 반연(攀緣)해 있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북회귀선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지구과학’ 노트를 꺼내 들었다. 표지 안장에 ‘Over the mountain lies the plain. (태산을 넘으면 평지가 보인다.)’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첫 수업이 1986년 2월 15일이었고 金 海錫 선생님의 존함이 적혀 있다. 천구적도 와 황도면이 23.5도로 기울어지고 그 교차점이 춘분과 추분점이 되며 이러한 겉보기 운동을 연구하는 것이 ‘구면 천문학(球面 天文學)’이며 책력(冊曆)의 바탕이 된다는 노트가 있다.
고마우신 선생님, 노량진에서 학원에 다닐 때 조그만 뒷마당에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봄에 그 녹색의 잎을 보면서 저 잎이 노오랗게 물들 때면 이제 들판에서 추수를 하듯이 일년 농사를 거둬들이겠지 하고 마음을 다잡던 생각이 난다.
고교 시절에 배웠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연구실에서 집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은행이 있어서 가을이면 온 길가를 노랗게 물들이는데 그때마다 ‘…이제 집도 짓지 않고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길게 편지를 쓰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오늘 조주록(趙州綠)을 읽다가
한 스님이 “누가 비로자나불의 스승입니까?”라고 묻자
“흰낙타가 왔느냐?”
“왔습니다.”
“끌고 가서 풀을 먹여라.”
라는 구절을 보다가
‘아! 업이 생을 끌고 오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一刀兩斷
한칼에 내 목이 떨어졌네.
그렇다면, 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다면 무엇이 있는 것이고,
없다면 이전에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마음은 그 곳에
일찍 뜬 달이 온 산을 따라 다니네.
새해 첫날이 저문다.
지하도 모퉁이에서 섶을 깔고 잠을 청하시는 분들과 원서를 들고 찬바람 속에서 헤매는 많은 수험생들 그리고 숙환으로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랑을 건넵니다.
블록을 찾아 주시는 모든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0년 1월 1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