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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탐욕의 세계사.

이상과 탐욕의 세계사.

-‘세계 지도의 탄생’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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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중학교 지리시간 백지도에 그림을 그렸을 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생전 처음으로 입항하는 미지의 항구에 대한 상상만큼이나 즐겁고 가슴 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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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M/V OCEAN CROWN호 실기사 때 Vancouver Washington에서 결혼한 딸의 집 이웃에 사시던 Helen Freeman 할머니를 알게 되어서 입항할 때마다 할머니의 아파트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갔었다. 한번은 National Geographic Society에서 발간한 지도 몇 점을 선물로 주셨다. 그 중에 유럽 전도도 있었는데 11년 뒤 의학과 2학년 여름 방학 때 그 지도를 나침반 삼아 유럽을 33일 동안 뒤지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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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본까지 범선 여행을 하거나 태평양을 항해해 보면 해도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는데 그러나 지도나 해도의 역사에 대하여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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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오지 도시아끼(應地理明) 교수님의 ‘세계 지도의 탄생’을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A. Toffler의 ‘제3의물결’의 내용들이 떠오르면서 교수님의 설명이 훨씬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지난해 정수일 교수님의 ‘고대 문명 교류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고대 이후의 문명교류사의 연장선상에서도 이 책의 내용이 매우 유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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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불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호류지 소장 ‘오천축도(五天竺圖)’에서는 구사론(俱舍論)에 입각한 수미산(須彌山)과 섬부주(贍部州)에 대하여 도해를 곁들여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불경의 이해에도 매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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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소개된 지도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는 헤리퍼드 세계 지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티오 지도’의 구조와 에덴동산을 뜻하는 동쪽을 ‘성스러운 방위’로 생각하여서 동쪽 방위가 지도의 위쪽을 차지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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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중국의 왕권 사상과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을 나타내는 중국의 ‘고금화이구역총요도(古今華夷區域總要圖)’는 중앙에 북송의 왕도였던 개봉(開封)을 중심으로 오악(五嶽)을 배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파르티아, 시리아, 페르시아 지역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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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시칠리아 왕국에서 제작된 이드리시 세계지도는 중세 이슬람 문명을 대표하는 세계도이다. 이 지도는 “지구구체설에 입각한 원추도법을 기본으로 그때가지의 중세의 고정적인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세계도이다. 그러나 메카를 향하는 방향인 키브라를 존중해서 지도의 위쪽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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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를 작성한 프톨레마이오스는 2세기 전반 로마 제국 전성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다. 그는 처음으로 경도와 위도를 설정하여 세계를 그렸다. 그가 고안한 의원추도법에 따라 지구가 구체인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경선과 위선을 모두 곡선으로 표현했다. “그는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의 서쪽 맨 끝에 있는 페로섬을 지나는 자오선 (현재 서경 18도에 해당한다)을 본초자오선으로 하고 경도는 그곳에서 동쪽으로 180도의 범위 그리고 위도는 남위 16도에서 북위 63도 범위를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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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중세 지도에 이어서 1502년 리스본에서 제작된 세로 105센티미터 가로 200센티미터의 축적 1,282만 분의 1정도로 추정되는, 지구 규모의 세계지도를 소개하면서 이 책의 결말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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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에 따른 동쪽의 낙원과 인도와 그 동쪽 어딘가에 황금이 풍부한 엘도라도가 있다는 환상은 동방무역의 길을 재촉하는 동기로 작용하였고 급기야 포르투칼에서는 인도로 가는 해도 개척을 국가의 목표로 세우고 매진하여 1498년 바스쿠 다 가마는 인도의 카파카타우에 상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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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퍼드 세계지도의 제작 연도는 1300년이고 칸티노 세계지도는 1502년이다. 그 200년 동안 동지중해를 무대로 하는 동방무역은 베네치아를 뒷받침한 경제 기반이었다. 갈레온(Galleon)선 함대를 운용하기 위한 해도가 필요했고 그리하여 지중해 세계에서 포르톨라노(Portolano)라는 해도가 제작되었다. 이들 해도는 방위문자판, 방위선, 나침반을 기본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그 때까지 포르톨라노는 오스만 제국과의 동방무역을 위한 지중해 항해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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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은 스페인이었다. 코사 세계지도를 작성한, 후안 데 라 코사(Juan de la Cosa)는 1492년 제2회 항해에서 콜럼버스가 승선한 산타마리아호의 소유자로서 그는 항해장을 맡았다. 코사 세계지도는 아메리카 대륙을 그린 현존 최고의 지도로 콜럼버스가 제1회 항해를 한지 8년이 지난 1500년에 제작되었다. 코사 세계지도는 포르톨라노의 작도법을 계승하여 직선으로 위선과 경선을 긋고 그 교차점에 방위문자판에 해당하는 컴퍼스 로즈를 배치하여 32분위선을 방사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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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사 세계지도는 기존의 지중해역 포르톨라노를 기본으로 삼고, 거기에 아프리카를 향해한 포르투칼과 신대륙에 도달한 스페인의 성과를 접합한 세계도라 할 수 있다. 이 두 부분이 통일된 기준에 따라 접합되지 않은 것이 급조된 코사 세계지도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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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하여 칸티노 세계지도는 답사하지 못한 주변부를 제외하고 현장의 실측을 통해 세계를 그렸다. 그것이 전체적으로 극히 ‘정확’한 세계의 묘출에 성공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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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티노 세계지도는 해설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상품정보다. 그 내용은 인도로 가는 해도를 탐색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상품정보는 장소에 따라 변한다. 지도에 기입된 내용은 아프리카 서쪽 연안-금과 노예, 아프리카 동쪽 연안-금을 지배하는 아랍 스와힐리 세력, 홍해 연안-인도양과 지중해 해역의 중계 채널, 페르시아 만 연안-진주 건조과실 말, 인도아대륙 연안-각종 향신료 피륙 보석, 말레이 반도-향신료 보석 자기 비단제품, 말레이 반도의 동쪽-향과 비단 전문 정보와 위도에 따른 위치 표시, 신대륙-탐색활동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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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전했다는 ‘황금의 나라 지팡구(Zipangu)’에 대한 열망으로 시작된 동방항로 개척의 결과는 1502년 제2차 항해에서 다 가마가 캘리컷의 번영과 집산 기능을 탈취하기 위해 인도의 캘리컷을 완전히 파괴했고 그가 저지른 온갖 잔인한 행위는 지금도 말라바르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후에 그곳을 방문한 루드비코 디 바르테바는 “캘리컷을 ‘이제 상인들도 내항하지 않는 황폐한 도시’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캘리컷은 항만도시국가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포르투칼인들이 아프리카 서쪽 해안에서 노예무역을 시작한 것은 1441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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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offler는 제1의 물결로 농경사회를 그리고 제2의 물결로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산업사회를 들고 있다. 이러한 산업사회의 특징은 바로 생산과 소비의 분리에 따른 시장의 발달로 서구의 산업사회는 더 많은 원자재를 구하고 생산된 상품을 팔기위한 시장을 확장하기 위하여 식민지를 개척하고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제국주의 광기를 몰고 왔으며 그 결과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의 많은 원주민과 현지인들이 이들의 압제와 착취와 유린에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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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에는 운전과 항해에 GPS를 이용하는 시대가 도래 하였지만 아직도 대양의 항해에는 해도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세계의 운송에 필수불가결한 해도와 지도가 동방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탐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그러한 끝을 모르는 탐욕과 착취 속에 희생되어간 많은 자연 자원과 인간들의 비애와 눈물과 한숨을 다시 한번 돌이켜 보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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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책임, 조국, 명예.

책임, 조국, 명예.

-‘끝나지 않은 전쟁 6.25’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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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봄쯤으로 기억된다. 주택가의 꽃들이 아름다운 Virginia주의 Norfolk에 기항했을 때 The Mcarthur Memorial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2층에 한국에서 보내온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의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20대 초반의 제복을 입고 혈기 왕성한 때라 George Patton 장군이나 Douglas Mcarthur 원수를 본받고 싶어 했었다. 특히 1951년 4월 19일 워싱턴 의회에서의 마지막 연설 장면은 인상적이었고 오랫동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며 삶이 어렵고 힘들 때 마다 혼자 되뇌이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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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till remember the refrain of one of the most popular barrack ballad of that day, which proclaimed most proudly that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And like the old soldier of that ballad I now close my military career and just fade away. An old soldier who try to do his duty as god gave him the light to see that duty. Good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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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시골에서 자랄 때 전쟁만화를 많이 보았고 아이들끼리 패를 짜서 전쟁놀이도 참 많이 했었다. 아마도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향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6.25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은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지만 전체적인 사실을 개괄하고 있지는 못하고 오히려 외국의 기록 영화나 전기물을 보고 대체적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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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럽게도 이번에 남도현 선생님의 ‘끝나지 않은 전쟁 6.25’를 읽으면서 전체의 전쟁의 흐름이나 각각의 전투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어서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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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78년 미국의 전기작가 William Manchester의 ‘American Caeser’의 내용을 요약한 1984년 6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한국전쟁과 맥아더 원수’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에 의하면 1950년 1월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행한 즉흥연설에서,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을 거쳐 류쿠열도로 이어진다.”고 밝힘으로서 공산측의 남한 침공을 유발한 점이 있고 1950년 3월 10일 미국 CIA는 “북한 인민군이 1950년 6월에 남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대비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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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이 발발한 지 4일째인 수요일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동경에서 수원으로 날아와 서울에서 1.6 km 떨어진 산등성이에서 맥아더 원수가 한강의 “철교를 없애버려”라고 한 것이 한강의 철교와 인도교를 일찍 폭파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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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에서 미해병 1사단 5연대가 상륙한 적색해안은 실기사 때 미국 서부해안의 Portland, Oregon이나 Vancouver, Washington에서 밀을 싣고 와서 하역하던 곳인데 간만의 차가 심해서 Dock로 드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구상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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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고향을 가는 시외버스를 타면 항상 다부동을 지나게 된다. 도로 옆에 다부동 전적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기 위하여 여름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의 시체가 부패해서 여기저기에서 터질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다는 내용에 숙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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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맥아더 원수’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의하면 “맥아더는 곧 겨울이 닥쳐와 압록강이 얼어붙으면 중공군의 도강이 쉬워질 것을 우려해서 공격의 속도와 강도를 높이기로 결정”하였으나 미 8군과 10군단 사이로 잠입한 30만 중공군을 맞아 “현재로서는 새로운 적을 저지시키는 것은 ‘거의 실행불능’한 일이라고 보고함에 따라 미국은 유엔군을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시키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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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23일 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이 지프차 사고로 사망한 후 후임으로 육군참모차장인 매슈 리지웨이 대장이 한국으로 와 8군 사령관에 취임하고 ‘Hand in Hand, Shoulder to Shoulder’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전선을 촘촘히 연결한 상태로 서서히 적을 밀어 붙여 맥아더가 그토록 암담하게 예언했던 파국을 막는데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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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의문점은 ‘끝나지 않은 전쟁 6.25’에서는 당시 공산군 총사령관 겸 조중연합사령관이 ‘팽덕회’라고 밝히고 있으나 ‘한국전쟁과 맥아더 원수’에서는 ‘임표’ 휘하의 48만 4000명의 중공군 및 인민군이라고 밝히고 있어서 다소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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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본서을 읽으면서 화천호를 왜 ‘파로호(破虜湖)’라고 명명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한국의 평화를 위하여 싸워주신 미국과 16개 참전국의 모든 분들, 전진부대 청성부대 그리고 서해 5도를 점령한 해병대를 비롯한 모든 선배 용사들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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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맥아더 원수’에서 “1945년 소련군 보병부대는 스탈린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한반도 북단에 진주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전함 미주리함상에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이 끝난 후에야 한반도에 상륙했다.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 직후 수명의 준장들이 국방성 내의 한 사무실에 황급히 모여 “한반도를 분할해야 하는데 어디에서 자르면 좋을까?”하고 의논을 하는 자리에서, 극동지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대령 한 사람이 한국은 사회적 경제적 단일체로서 분할할 수 없는 곳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장군들은 그래도 꼭 분할을 해야만 하고 그것도 그날 오후 4시까지 분할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중국에서 근무하다 국방성으로 돌아온 ‘딘 러스크’라는 젊은 장교가 행정상 북위 38도 선을 따라 분할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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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없고 국력이 약하면 이렇게 된다. 다시는 이처럼 참혹한 재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들은 결코 6.25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오늘이 바로 휴전협정을 조인한 날이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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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7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이제는 흐릿한 기억의 강가에서.

이제는 흐릿한 기억의 강가에서.

– ‘7080 FM Goldern Pops’ CD를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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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계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이사를 가시면서 정원에서 키우시던 금붕어 열 마리를 부탁하셨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고 두었던 어항을 청소하고 실리콘으로 다시 보수를 하면서 마당에서 월요일에 배송된 CD를 걸어 놓고 Juice Newton의 ’Angel of the morning’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도 오랜, 27년이 다된 그날 저녁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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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태평양 연안에서 PEMEX 석유회사에 용선된 미국 Maritime Overseas Corporation 소속의 product oil carrier M/V PLUTO 선원들은 저녁이면 모두 Manzanillo의 술집으로 달려갔다. 일층은 Bar고 이층은 침실이 있었다. 기관사들 끼리 앉은 테이블에 20살쯤 된 여자아이가 목에 십자가를 달고 앉았다. 너무도 깔끔하고 얼굴이 맑아서 사귀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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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아이가 술집에 나와야 할까? 아직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사연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때가 20대 초반이었으니까 아직은 때가 덜 타서일까 나는 그냥 맥주를 홀짝이면서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때 Juice Newton의 ’Angel of the morning’이 흘러 나왔다. “There’ll be no strings to bind your hands, not if my love can’t bind your heart; And there’s no need to take a stand. For it was I who chose to start.” 특유의 흐느끼는 소리에 젖어 있을 때 건너편의 마음씨 좋은 1기사와 이층으로 그녀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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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뭔지는 모르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만 생각했다. 그 후로 ‘아침의 천사’를 들으면 언제나 그날 저녁의 그 술집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제는 그녀를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늙음과 함께 생긴 상처 때문일까? 이제는 그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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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CD에 Paul Anka의 Papa는 70년대 고교시절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팝송이다. 가사가 비교적 쉽고 음이 경쾌해서 그랬던 것 같다. “Ev’ry day my Papa would work to help make two ends meet, to see that we would eat, keep shose upon my feet. Growing up with him was easy, time just flew on by, the years began to fly, he aged and so did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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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2학년 때 대구 교동 시장을 뒤져서 중고 SONY 녹움기를 샀다. 그때 7만 2천원이면 꽤 큰돈 이었다. tape에 녹음해서 들은 경음악 중에 ‘Sealed with a kiss’가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가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Tho we gotta say good bye for the summer, Darling I promise you this: “I’ll send you all my love ev’ry day in a letter, Sealed with a kiss, “Guess it’s gonna be a cold lonely summer. But I’ll fill the emptiness. I’ll send you all my dreams ev’ry day in a letter Sealed with a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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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우리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가수 중에 우수 어린 모습의 인디언 혼혈의 Lobo(회색 이리)가 있었다. 나는 특히 ‘Stony’와 ‘I’d love you to want me.’ ’We’ll be one by two today’를 좋아 했었다. “When I saw you standin’ there. I ’bout fell out’ my chair, And when you moved your mouth to speak I felt the blood go to my feet. Now it took time for me to know what you tried so not to show. Somethin’ in my soul just cries, I feel the want in your blue eyes. Baby, I’d love you to want me the way that I want you, the way that it should be Baby, you’d love me to want you the way that I want to if you’d only 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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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부족하고 척박했던 그 시절 FM Pop Song 시간은 메마른 정서와 문화적인 갈증을 달랠 수 있었던 고대하던 시간이었고 막연히 전파 속에 흘러나오던 외국 문화에 대한 갈망과 동경은 결국 약 5년간의 해기사 생활을 하게 된 동기의 일부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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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시 의학을 공부해서 모교에서 교수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삶이 너무도 행복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지금처럼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을 당연하다는 듯이 향유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시간에 맞취 FM 라디오에 귀 기울이고 아나운서의 시작 멘트에 열광하던 그 시절을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그것은 우리들의 아련한 망각의 강가에서만 흐릿한 흔적을 남기고 있으리라.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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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7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생활의 발견 (The Wisdom of Living)

생활의 발견 (The Wisdom of L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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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20년의 결과이나 지성은 수억 겁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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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몸은 약 6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하루가 지나면 이중 5천억 개의 세포가 모습을 바꾼다.

그러므로 암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단지 조금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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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수억 겁의 마음이 쌓여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일 뿐이므로

다잡아 찾아보면 그저 공할 뿐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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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01 巳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