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2’을 읽고
우선 저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를 드리면 저는 1960년 경북 문경(점촌)에 태어나 고교는 대구에서 그리고 목포에
서 해양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부터 84년까지 외항선 기관사로 근무한 후 1985년은 1년간 시골집에서 공부를 하
고 1986년 1년은 서울 대성학원에 다닌 후 1987년 부산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1993년 졸업 후 의사가 되
고 동대학원에서 의학석사(약리학 전공) 의학박사(면역약리학 전공)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모교의 약리학교실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소년기에는 학문(art)을 배워야 하고 청년기에는 욕망(kama)을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하며 중년을 지나면 비로소 법
(darhma)을 체득하여야한다.” Brahman을 가르치는 교재의 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어제 약 10시간에 걸쳐서 이 책을 읽고 여느 때처럼 저녁 산책을 하면서 리뷰를 구상하다가 떠올린 구절입니다. 우
리들의 삶을 풍요하고 유익하게 이끌어 주시고 계시는 많게는 저보다 약 25년 선배님들부터 적게는 약 25년 젊은,
서른 분들께서 펼쳐 보이신 진솔한 삶의 모습에 깊은 감동과 고마움을 느낍니다. 또한 TV 등의 대중매체에서 보는
현실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훨씬 역동적이고 희망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또한 시골 출신이라 60년대 후반 그리고 70년대 초반에는 여러 분들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교과서 외에는 책
이 참 귀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으로 만화책을 어쩌다 사면 어머니께서는 모두 엿장수에게 주셨습니다. 대구
로 고교에 진학한 후에는 주말이면 그 당시 대구 시청 앞과 남문시장에 100여 곳은 족히 되었던 헌책방을 참 많이
도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읽었던 책이 ‘논어’ ‘어사박문수’ ‘미운 오리 새끼’ ‘젊은 그
들’ ‘돈키호테’였습니다. 그야말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키우던 때였습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난을 해결하고 바깥세상을 둘러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외항선 기관사가
되었습니다. 승선 근무를 하던 중에 Raymond A. Moody 박사의 ’Life after life’를 읽게 되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
는 것은 ‘사후에도 삶은 계속되며 다음의 생까지 타인에게 행한 선(善)과 익히고 깨달은 지식은 지니고 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부의 축적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리
고 다시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의학과 3학년 때 동료의 서가에서 알게 된 책이 Viktor E. Frankl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en’s search for mea
ning)’였습니다. 의학과 1학년 때 선친께서 별세하시고 막내 동생은 한의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저도 학생이었지만
막내의 생활비와 등록금을 해결해 주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내용
이 너무 가슴에 와 닿고 위로가 되어서 책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구절들을 일일이 카드에 필사를 해서 식사를 하면
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그 무엇도 이전의 가족들과 가졌던 추억과 기억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는 구절
은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의과대학 졸업을 앞두고 학생들의 사은회에 가서 몇 마디 축사를 하는 경우에는
꼭 “앞으로의 수련생활이 어렵겠지만 자신의 명예와 품위를 지키라.”고 당부를 하곤 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지적하셨듯이 단 한권의 책이 인생의 전체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그
마한 변화가 축적되어서 삶은 더욱 충실하고 풍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통해서 저자들의 영혼으로부터 우리들
에게 쏟아지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이상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받게 되는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글을 써 주신 많은 분들께서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제가 6년 전 한국해양대학교에
서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는 원양항해 실습선 ‘M/V 한나라’ 호에 선의(Ship’s Doctor)로 한 달 정도 초빙을 받아서
간 적이 있었는데 생도들에게 훈시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해준 연설 중에 “결코 쉽게 이루지 못할 만큼 큰 꿈
을 품도록 하십시요. 그리고 그것을 빨리 실현해야 하겠다고 조바심내지 마십시오. 그러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 결코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계속하는 한 언젠가는 여러분의 꿈을 가득 실은 배
가 여러분들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라고 치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저도 명을 아는 나이(知命)가 되었습니다. 주변의 상황을 보면 공병호 선생님과 박현정 선생님의 자신의 계발
에 충실해서 ‘홀로서기’를 준비하라는 가르침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또한 문용린 교수님의 ‘부유한 노
예’에 대한 견해는 습관적으로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1992년 MS-DOS를 사용하는 컴퓨터로 진단방사선과 보고서를 작성하여 dot printer로 인쇄하여 제출하기 시작해서 19
94년 Macintosh LC 475 기종으로 석사논문을 작성하고 1996년 의과대학에 HDD 1 giga bytes의 컴퓨터와 인터넷이 설
치된 이후로 3권의 노트북과 6대의 데스크탑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고 분자생물학의 발달과 더불어 생명공학과 의
학의 발전으로 방대한 량의 정보가 매일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삶에서 본원적인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데 필요한 중요한 정보와 지식은 일반인들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영섭 선생님의 의
식의 문이 열리는 체험과 C. G. 융의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Man and his symbol)’이 시사하는 바는, 조성기 선생님
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en’s search for meaning)’에서 “인간 존재의 무한한 뜻은 고뇌와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아우슈비츠라는 혹독한 상황에서 인간의 선(禪)적인 사유가 다다를 수 있는 깨달음의 극치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병호 선생님께서 “자신을 제어하는 일을 준(準)종교적인 차원까지 끌어 올리게 되면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된
다.”고 하는 지적은 매우 공감이 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영겁의 존재들이며 이미 자유롭고 구원되어 있으며 있는 그대로 모두가 깨달은 분들이기 때문입니
다.
감사합니다.
8/5/‘09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