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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미솔 선생님의 ‘두번째 초대’를 받고

윤 미솔 선생님의 ‘두번째 초대’를 받고

지난 금요일 저녁 무렵 산책로에 들어서는 중에 한 노스님께서 짐 옮기는 것을 도와드리다가 엉

겁결에 달마도(達磨圖)를 한 점 사게 되었다. 1층 거실에 걸어 두고 보다가 서제(序題) 중 ‘일도출

생사 심외무법’(一道出生死 心外無法: 한길이 생사를 떠나 있으니 마음밖에는 한 경계(인식의 대

상)도 없다.)이라는 두 구절이 잔잔한 여운으로 가슴에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있다.

실험 때문에 새벽 일찍 연구실로 올라오면 언제나처럼 병동에서는 2시가 조금 지난 시간임에도

불이 켜진 병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암환자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라 대부분의 병실에서

는 말기환자들이 고통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아프다. 몇몇

상태가 나은 환자들은 바다 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밤중에 운동장에서 환자복 차림으로 산책을 하

거나 운동을 하시는 것을 볼 때마다 건강하실 때 미리 좀 챙기시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

나 환자의 육체가 겪고 있는 통증과 장애로 인한 어려움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죽으면 모든 것

이 끝난다고 하는데 그 후로 어떻게 되는가?’하는 의문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공포와 불안으

로 더 고통스러워한다는 현실이다.

윤 미솔 선생님의 ‘두번째 초대’의 내용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우리들 자신

이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것으로 요약이 될 것 같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꼭 말기암환자들 뿐

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고는 사소한 시련이나 갈등도 극복하

지 못하고 좌절한 채 도피수단으로 자살을 택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되며 ‘한번 뿐이라는

삶’이라는 생각은 세상을 더욱 각박하고 비정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 연구를 포함하여 다양한 단체와 수련회에서 육

신의 사망 이후에도 또 다른 형태의 삶은 계속된다고 하는 발표와 저작물들이 증가하고 있어서

많은 용기와 위로를 받고 있다. 비록 일천한 지식이지만 현대물리학에서도 양자중력(quantum gra

vity)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마음의 문제를 피해갈 수 없으며 궁극에 가서는 에너지와 시공간과 마

음이 plank scale(10-33 cm)에서 서로 얽혀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규명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진면목(眞面目) 또는 자성(自性) 또는 우리의 참모습에 접근하는데 있

어서 서구의 수리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은 아직까지는 매우 서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

록 칼 융이 1927년 티벳의 바르도 퇴돌(Bardo Thos-grol)이 ‘티벳 사자의 서’라는 제목으로 1927

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영역된 것으로부터 ‘많은 영감과 통찰력을 얻었다’고 고백하고는 있

지만 아직까지 현대과학이나 의학이 마음의 본모습을 충분히 그리고 올바르게 기술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참모습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유체이탈을 설명하고 있다. 1988년 가을 해

부학실습을 하면서 골똘히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내가 자신의 책을 읽고 있는 머리 위를 내려다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그 상태는 곧 끝났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것이 유체이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는 일주일에 세수하고 등교하는 날이 이틀이 되

지 않을 정도로 과중한 학업과 시험에 시달리고 있었던 때라 그 경험을 그렇게 중요하게 받아들

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책에서 읽었던 임사체험의 경험과 너무도 유사했다. 사실 유체

이탈의 비가역적인 경우가 임종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설명하는 유체이탈을 체험해보

면 육체를 떠나서도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으며 이러한 체험은 세상을 바라

보는 자세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삶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속된다는 느긋함과 평화로움울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체험은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추구해 볼 수 있는데 최근 기공훈련에 의한 선계통신(chann

eling)에 의해 기록된 자료들을 찾아 읽을 수도 있다. 전자의 방법은 스스로 영체를 육신에서 이탈

시켜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반면 후자의 방법은 영체의 이탈이 없이 선계에 대한 통신망을 구축(tu

ning)하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료에 대한 지식의 획득만으로는 참다운 본모습을 체득할

수 없고 반드시 일련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글 중에 ‘수제비 반죽’이라는 독특한 표

현이 나오는데 그 반죽에는 우리 모두와 우주가 들어가 있다.

또 다른 한 가지 방편으로서 명상이나 화두참선을 들 수 있는데 실제로 어떤 공안을 제대로 체득

하면 단박에 자신의 본모습을 보게 되고 이미 모든 생명체가 있는 그대로 깨달아서 자유로운 상

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더 이상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시공간과 오감의 제약을 넘어선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 체험은 너무도 강렬하고 또렸해서 비록 육신을 잃는

다고 해도 결코 두려움이나 공포에 빠지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육신이 단지 하나의 의복이나

자동차, 건물과 같으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나 운전자, 집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시공의 제약에

서 자유롭고 모든 파괴와 멸망에서도 자유롭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시(禪詩)에서는 말한다.

‘월색천담 수무흔 죽영소계 진부동’(月色穿潭 水無痕 竹影消階 塵不動: 달빛은 못을 뚫었으나 물

에는 흔적이 없고, 대나무 그림자 뜰을 쓸고 가나 티끌은 움직이질 않네.)

그러할 때 “선생님이 앉은 자리가 어디입니까? “(Where are you sitting?: WAYS?)

 

9/20/‘09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