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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학위로 푸념은 그만, 흙 속에서 철들까?

어설픈 학위로 푸념은 그만, 흙 속에서 철들까?

우석훈 선생님의 ‘불황 10년’ 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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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7학번이다. 십여 년 전 고교 동문 출신 의사회에서 386 세대 이야기가 나와서 담론을 벌이던 중, 정형외과를 개원하고 있던 친구가 우리들은 386 세대가 아니고 우리 몇 년 아래 아이들부터 386 세대라고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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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처음 미국에 발을 디딘 것은 1979년이다. 저녁에 십여 리 길을 걸어서 부두로 돌아오면서 자동차를 몰며 젊음을 구가하는 내 또래의 학생들이 부러웠다. 왜, 누구는 태어나면서 자기 차가 있고 누구는 단지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그것이 불과 35년 전의 한국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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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선생님의 ‘불황 10년’ 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은 그 옛날을 맴돌게 된다. 외항선 기관사였고 상선사관이었지만 우리들은 당연하게 기름에 쩐, 다 헤져 가는 작업복을 입고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음과 작업화 안에 땀이 흘러내려서 고이는 열기 속에서 하부 갑판의 발판을 열고 기관실 바닥의 구석구석을 돌며 수 십 미터씩 달려가고 있는 연료 윤활유 청수 해수 파이프라인을 찾느라고 온몸이 기름 범벅이 되도록 오수와 슬러지 속을 누비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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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래도 1960년대 일자리가 없어서 대학을 졸업한 분들이 서독의 탄광 막장에서 일하는 것이나 그 이후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열사의 나라에서 일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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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1장은 “집 살까요? 말까요?”로 시작된다. 2008년 쯤, 지금은 마흔이 된 한 선생이 그 당시 2억을 빌려서 아파트 2채를 분양받았다. 그 이후 결국은 이자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철도 없을뿐더러 무모하기까지 하다. 이장의 전체 내용은 매우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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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 빠진 것이 있는데 아파트의 건축비와 대지에 대한 원가 산정이 되어 있지 않다. 2008년쯤 다른 후배가 정형외과 병원을 신축했을 때 평당 건축비가 220만원이었다. 최근 파주에 평당 분양 가격이 2,000만원이라고 책에 기술되어 있는데 그럼 물가 인상률을 감안하더라도 그 많은 거품과 차액은 누구의 손에 들어갔을까? 이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다. 나는 정치권과 건설회사에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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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9시에서 5시까지 근무하고 토, 일요일 다 놀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해서는 돈을 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파트에 살면서 돈을 절약할 수는 없다. 일례로 단독주택인 경우 태양열과 태양광 발전으로 전력을 거의 자급자족할 수 있다. 현재 가구당 소비 전력이 월 평균 350 kWh 이상 사용하는 경우 정부에서 무상으로 태양광 설비를 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웃과의 불필요한 경쟁과 비교로 쓸데없는 낭비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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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황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다. 김영삼 정권 말기 ‘국민소득 2만 불’이라는 허구를 지키기 위해서 환율 방어를 하면서 외화보유고를 소진 시킨 것과 기아차, 한보사태로 6조원의 부실채권이 발생한 것을 빌미로 시작해서 터진 IMF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무리한 구조조정의 종용과 대우를 해체하는 등, 헐값에 알짜 기업들을 외국에 팔아 그때 천문학적인 국부가 국외로 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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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외항선 기관사를 그만 두고 다시 서울 노량진 대성학원에서 공부할 무렵, 하루 종일 최루탄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87년 의예과에 입학을 했을 때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몇 년간 수업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칠 무렵이면 무슨 명분을 내세워서 시험을 거부하고 또 수업거부를 해서 학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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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으로 허송세월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밤에 학교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면 책상에 쌓아둔 전문서적을 불태우는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어떻게 같은 학교 동문의 책을 학생이 불태울 수 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논리였다. 그렇게 설쳐대던 주사파를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은 20여년이 흐른 지금 모두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저자도 에필로그에 ‘정치가 실패한 나라’라고 적고 있는데 바로 그 실패한 정치를 만든 장본인이 우리들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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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불황시대에 우아하게 사는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저자의 주장대로 어떻게든 30% 정도의 저축률을 유지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한 달에 100만원이 소요되는 차를 없애고 그 돈을 저축해야 한다. 1984년 외항선에서 내릴 때 월급이 120만원이었다. 그렇게 5년을 근무하고 그 돈을 모두 집에 보내주었으나 막상 내가 결혼할 때는 현금이 없어서 친구에게 200만원씩 400만원을 빌려서 결혼했고 부조금으로 갚아주고, 돈이 없어서 신혼여행은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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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이여 엄살 부리지 말라. 지금의 가장 큰 비극은 젊은이들이 제대로 굶주림과 가난을 겪어 보지 못했고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일하지 않은데 있다. 비정규직, 임시직, 협력직원 다 맞는 말이다 그러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모두 안이하게 돈 벌려고 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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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불황의 시대에 내 일은 어떻게 될까?’에 나오는 글이다.

“복잡한 이야기를 다 덜어내면 남는 메시지는 ‘어렵고 월급이 적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청년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이다. 이 긴 메시지를 ‘미스 매치’라는 한마디에 담았다. 게으른 청년들, 까다롭고 일 못하는 청년들, 너희에게 우리가 돈을 더 쓸 필요를 못 느끼겠다, 이 모든 메시지가 ‘미스매치’라는 단어 한마디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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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초두에 ‘회사는 항상 나가라고만 한다’고 하는데 왜, 회사에서 좀 더 있어달라고 붙잡는 사원이 되지 못하는가? 어떻게 생산성을 늘이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내게 떨어질 피자 조각이 크기만을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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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불황 10년, ‘나쁜 교육’이 치료되는 시기’의 글들은 특히 마음에 와 닿는 내용들이 많았다. 조기 유학을 했던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서 기업에서 홀대를 받는다는 글이 있었는데 몇 년 전 외국 연수를 1년 다녀온 모 교수의 딸이 고교생이 되어서 영어를 아주 잘하게 되었는데 국어를 못해서 한 달에 100만원씩 주고 과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몇 해 전 일본 가고시마에 학회가 있어서 참석을 했는데 도우미로 온 일본 여성이 구사하는 한국어가 아이들 응석부리는 듯한 언어를 사용해서 당혹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영어조기교육, 선행학습 폐단이 많다. 진심으로 충고하건데 그 돈 아끼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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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 점수 800점을 넘어가야 의예과를 수료할 수 있다는데 약리학 원서 읽고 발표하라고 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 학생이 다수 있고 의학과 3학년 학생이 방금 발표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라고 하니 ‘가르쳐 주는 학원이 없어서 못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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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학기말이면 학생 성적사정 때문에 연구실로 전화를 하는 엄마들이 있는데 이 또한 매우 심각한 문제다. 아이들이 엄마 치마폭에 싸여 자라서 유약하고 패기가 없다. 더 이상 허우대만 멀쩡한 베이비를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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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을 이기고 부자가 되는 방법, 다른 것 없다. 같은 영화 40번 볼 시간 있으면 전공서적 더 읽고 더 시장조사하고 공부하고 일하라. 시간을 아껴 쓰고 부지런히 손발을 움직여라. 진심으로 말하건대 변명하고 핑계대지 말라. 그런 것은 흙 속에 들어가서 해도 충분하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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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1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금융전쟁의 희생양 대우

금융전쟁의 희생양 대우

신장섭 교수의 ‘김우중과의 대화’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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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농촌에는 흙과 짚단과 옹기와 몇 권의 교과서가 전부였다. 빈부의 차도 별로 없이 고만고만했다. 70년대 후반에 와서 고향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져 갔다. 1974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기 위하여 대구로 떠났다. 자취방 살림이라야 책상 하나 부엌에는 라면 박스하나가 전부였다. 연탄이 꺼지면 아침과 점심을 굶고 그날 학교 수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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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를 졸업 후 해양전문학교를 나와서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외항선 기관사로 근무했다. 고교시절 부실했던 공부를 다시 하기로 결심하고 집에서 일 년, 그리고 다시 일 년 학원을 다녀서 1987년 부산에 있는 현재의 모교에 입학했고 1993년 졸업을 하면서 교수님의 권유에 따라 약리학교실에 조교로 남게 되었다. 그때 월급이 80만원이었다. 1997년 전임강사로 임용되어서 그해 여름 2주간 터키와 그리스의 섬들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환율이 달러당 1300원은 되었던 것 같았다. 그해 11월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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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우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학부시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다가 대륜고등학교가 있었던 대봉교 건너 방천시장에서 김우중 회장이 신문팔이를 했었다는 것과 2001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에 있는 부하라의과대학교와 모교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모교 대표로 방문했을 때 타슈켄트 시내의 자동차 중 거의 99%가 대우차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 대우해양조선이 세계 선박건조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 신장섭 교수의 ‘김우중과의 대화’를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지금의 풍요를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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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사태를 겪으면서 그때까지의 자신감과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와 한강의 기적을 구가하던 열기는 냉랭할 정도로 식은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쇠락의 전기가 된 것이 바로 대우 사태로 기억되는 IMF에 대한, 잘못된 국가와 정부의 경제정책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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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정부가 개인 기업을 보호는 못할망정 기업주를 해외에 추방하듯이 출국시키고 손발을 묶은 상태에서 외국 세력의 강압에 못이겨서 굴욕적으로 해체시킨 과오는 반드시 밝혀서 공과를 제대로 판정하고 대우라는 기업에 대하여 새롭게 평가가 내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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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금융을 장악한다면 그 나라의 정권이 어떻게 교체되든 그 주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로스차일드로서 1815년 6월 19일, 워털루 전쟁의 정보를 먼저 알게 된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그날 하루 만에 총 2억3천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벌여들였다. 이들은 유럽의 전쟁 때마다 양쪽에 전비를 대는 방식으로 부를 쌓아갔다. 또한 1913년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만드는데 관여한 자들 중에 로스차일드의 대리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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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는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에 따라 1945년 12월 미국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1998년, 안타깝게도 르윈스키 스캔들로 시끄러웠던 미국의 빌 클린턴은 그해 11월에 한국을 방문해서 DJ와 정상회담을 한 뒤 “5대 그룹 개혁이 부진하다”고 언급했다. 결국 한국 정부가 이들 압박에 무릎을 꿇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막대한 부의 해외 유출과 기업의 도산 실업자 양산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장기적인 불황과 경기 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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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안타까운 몰락에도 불구하고 김우중 전 대우 회장께서는 베트남에서 젊은 경영인들을 양성하는 글로블 YBM(GYBM Global Young Business Managers)과정을 만들고 2012년부터 운영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지난 상처의 쓰라림을 딛고 다시 미래의 희망을 추구하시는 김 전 회장님께 무한한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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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가난과 현재의 삶을 비교해 보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너무도 나약하고 패기가 모자란다. 모두 심기일전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해 분투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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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4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을 읽고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을 읽고

 

우선 기쿠가와 세이지 선생님과 번역해 주신 김정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79년 3월 금문교를 지나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근교의 Venecia에 상륙을 했었다. 그로부터 약 5

년 정도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많은 항구도시들을 외항선 선원으로 드나들었었다. 바로 작가가 관광객으로 방문했

을 때 느꼈던 놀라운 미국을 나도 체험하고 있었다. 1984년 12월 22일 성탄절을 앞두고 루이지애나의 Lake Charles

에서 약 10개월간 근무했던 M/V Pacific Hunter호에서 하선을 해서 성탄절 전야에 귀국을 했다. 2년 정도 다시 공부

를 시작해서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오랫동안 미국 소식은 단지 대중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것이 전부였고 학교생활

에 파묻혀서 거의 바깥 세계는 잊고 살았었다.

 

2001년 8월 3일부터 8월 18일까지 본교가 자매 결연을 맺게 되어서, 교수대표로 학생들과 함께 아비시나(Avicenna)

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부하라(Bukhara) 의과대학을 방문하여서 약 700여권의 의학

서적을 전해주고 현지 팀과 함께 타슈켄트(Tashkent) 근교의 농촌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너무도 한국의 시골과 유

사한 경관에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부하라(Bukhara)는 승원(僧院)이라는 뜻을 지닌 도시로서 구소련에서 유일하

게 이슬람신학교인 ‘미르 아라프 메드레세’가 남아있던 유서깊은 이슬람 도시였으나 모든 분들은 친절하고 순박했

다. 또한 한국의 드라마가 방영되어서 나도 알지 못하는 ‘현이와 덕이’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미국의 9.11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생생하게 접하게 되었고 그간에 여러 방송국에서 제작된 다

큐멘터리도 보아왔다. 1997년 겨울 한국에 IMF가 왔을 때도 서울의 한 호텔에 칩거하면서 막후에서 진두지휘를 하

고 청바지 차림으로 사라진 미국의 재무부 소속 직원을 제외하고는 다소 석연치않다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뚜렸이 잡

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2007년 11월 미국의 Subprime Mortgage 사태가 발생하고 그 내막이 밝혀지면서 그간의 Wa

ll Street를 비롯한 세계금융시장이 얼마나 부패하고  모순투성이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 령 암살은 링컨과 케네디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였고 링컨은 노예해방 때문에 케네디는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0여년의 세계 역사의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한 이들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저자의 역작을 읽게 되면서
그동안 풀리지 않은 많은 사회현상과 의문들이 마치 수없이 흩어져 있는 염주들을 하나의 실에 꿰차듯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글을 읽는 중간 중간 너무도 황당하고 허구라는 느낌이 들어서 ‘youtube 동영상 링크’를 실제로 확인해보았다. 그

중에 ’Aaron Russo: Rockfeller knew about 9/11 well in advance’는 삭제되고 없었다. 그 외의 ‘Aaron Russo – Ar

chitecture Of A Prison Planet (Pt. 4)’, ‘Bush can’t answer an important question, George bush doesn’t kno

w what to say’, ‘Lt. Col. Bo Gritz claims CIA drug dealing, July 1988’의 자료들은 아직 온라인상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상기의 어둠의 세력들은 일개 대통령이나 미국의 정부보다 더 상위에서 무소불

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신들의 탐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획책을 일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징후가 내 주변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돌이켜 보면 이미 197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

다. 그 당시 우리나라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하루에 일인당 물을 30리터 이상 소비해야 문화인으로 분류된다는 내

용이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의 시골에는 집집마다 ‘물두멍’이라고 해서 약 20-30 리터 되는 단지를 부엌에 두고 어

머니들이 매일 새벽마다 물동이로 우물을 퍼서 머리에 이고 날라서 8명의 식구가 사용하거나 조금 사정이 나은 집

은 우물을 파서 사용하였다. 어쨌든 그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범주에 따르면 문화인이 아니었다. 그 당

시 영어 독해 내용에 미국은 자동차가 일반화 되어서 약 100 마일 떨어진 곳까지는 이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야말

로 ‘소비가 미덕’이라는 사악한 구호였다. 한때 ‘어느 샐러리 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이 상연되어 화제가 되었

을 때도 우리들은 그 제도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경하고 있었고 지금도 우리들은 그 주

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92년 의학과 4학년 자습실에 모 카드회사에서 찾아와서 소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발급주기 시작해서

그 후로는 시내곳곳에서 신용카드가 사은품까지 안겨 주면서 발급해주고 소비를 조장한 적이 있다. 지금도 주변에

는 욕망과 빚에 얽어 매여 노예로 전락한 군상들이 많다. 불과 30년 전 ‘검소하고 근면하게 그리고 저축하자.’던

구호는 이제는 한국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문구가 되었다.
부유하고 여유있게 살고 싶은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켜서 그리고 타인을 타락과 몰락과
빈곤과 죽음으로까지 내몰면서 나의 허영과 탐욕과 환상을 추구하겠다는 철학이나 종교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이제 세계는 물 부족을 이야기하고 환경오염과 PeakOil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도 한때는 인류의 고향이었으나
그 후로 오랫동안 착취의 대상이었던 아프리카와 일부의 아시아 그리고 세계 도처의 소수민족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굳이 그들에게 구호품이나 원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한 번 더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단지 하루가 지났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단지 내가 좋아서 차를 사

서 달린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누군가는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기회를 위하여 양보하고 조

금은 더 걷거나 자중하면 안될까?

 

나는 바람직한 삶이란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고 쉽게 자연과 가까이할 수 있는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

다.

그렇게 친절하고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들 그들의 나라가 범죄와 마약과 빚에 찌들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마치 한

때 사랑했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돌아서서 잊고 지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내 앞에 나타난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솟아나는 연민을 주체할 수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가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다듬어

서 우리 모두는 오감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영겁의 존재들이며 그 존재들은 서로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

고 있는 하나의 큰 존재들이며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끝으로 미국에 살면서 수많은 고뇌와 번민과 갈등 속에서 이글을 쓰기를 주저하시지 않은 저자의 용기와 또한 역자

분의 노고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9/5/‘09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