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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을 읽고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을 읽고

 

우선 기쿠가와 세이지 선생님과 번역해 주신 김정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79년 3월 금문교를 지나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근교의 Venecia에 상륙을 했었다. 그로부터 약 5

년 정도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많은 항구도시들을 외항선 선원으로 드나들었었다. 바로 작가가 관광객으로 방문했

을 때 느꼈던 놀라운 미국을 나도 체험하고 있었다. 1984년 12월 22일 성탄절을 앞두고 루이지애나의 Lake Charles

에서 약 10개월간 근무했던 M/V Pacific Hunter호에서 하선을 해서 성탄절 전야에 귀국을 했다. 2년 정도 다시 공부

를 시작해서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오랫동안 미국 소식은 단지 대중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것이 전부였고 학교생활

에 파묻혀서 거의 바깥 세계는 잊고 살았었다.

 

2001년 8월 3일부터 8월 18일까지 본교가 자매 결연을 맺게 되어서, 교수대표로 학생들과 함께 아비시나(Avicenna)

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부하라(Bukhara) 의과대학을 방문하여서 약 700여권의 의학

서적을 전해주고 현지 팀과 함께 타슈켄트(Tashkent) 근교의 농촌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너무도 한국의 시골과 유

사한 경관에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부하라(Bukhara)는 승원(僧院)이라는 뜻을 지닌 도시로서 구소련에서 유일하

게 이슬람신학교인 ‘미르 아라프 메드레세’가 남아있던 유서깊은 이슬람 도시였으나 모든 분들은 친절하고 순박했

다. 또한 한국의 드라마가 방영되어서 나도 알지 못하는 ‘현이와 덕이’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미국의 9.11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생생하게 접하게 되었고 그간에 여러 방송국에서 제작된 다

큐멘터리도 보아왔다. 1997년 겨울 한국에 IMF가 왔을 때도 서울의 한 호텔에 칩거하면서 막후에서 진두지휘를 하

고 청바지 차림으로 사라진 미국의 재무부 소속 직원을 제외하고는 다소 석연치않다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뚜렸이 잡

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2007년 11월 미국의 Subprime Mortgage 사태가 발생하고 그 내막이 밝혀지면서 그간의 Wa

ll Street를 비롯한 세계금융시장이 얼마나 부패하고  모순투성이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 령 암살은 링컨과 케네디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였고 링컨은 노예해방 때문에 케네디는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0여년의 세계 역사의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한 이들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저자의 역작을 읽게 되면서
그동안 풀리지 않은 많은 사회현상과 의문들이 마치 수없이 흩어져 있는 염주들을 하나의 실에 꿰차듯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글을 읽는 중간 중간 너무도 황당하고 허구라는 느낌이 들어서 ‘youtube 동영상 링크’를 실제로 확인해보았다. 그

중에 ’Aaron Russo: Rockfeller knew about 9/11 well in advance’는 삭제되고 없었다. 그 외의 ‘Aaron Russo – Ar

chitecture Of A Prison Planet (Pt. 4)’, ‘Bush can’t answer an important question, George bush doesn’t kno

w what to say’, ‘Lt. Col. Bo Gritz claims CIA drug dealing, July 1988’의 자료들은 아직 온라인상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상기의 어둠의 세력들은 일개 대통령이나 미국의 정부보다 더 상위에서 무소불

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신들의 탐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획책을 일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징후가 내 주변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돌이켜 보면 이미 197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

다. 그 당시 우리나라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하루에 일인당 물을 30리터 이상 소비해야 문화인으로 분류된다는 내

용이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의 시골에는 집집마다 ‘물두멍’이라고 해서 약 20-30 리터 되는 단지를 부엌에 두고 어

머니들이 매일 새벽마다 물동이로 우물을 퍼서 머리에 이고 날라서 8명의 식구가 사용하거나 조금 사정이 나은 집

은 우물을 파서 사용하였다. 어쨌든 그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범주에 따르면 문화인이 아니었다. 그 당

시 영어 독해 내용에 미국은 자동차가 일반화 되어서 약 100 마일 떨어진 곳까지는 이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야말

로 ‘소비가 미덕’이라는 사악한 구호였다. 한때 ‘어느 샐러리 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이 상연되어 화제가 되었

을 때도 우리들은 그 제도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경하고 있었고 지금도 우리들은 그 주

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92년 의학과 4학년 자습실에 모 카드회사에서 찾아와서 소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발급주기 시작해서

그 후로는 시내곳곳에서 신용카드가 사은품까지 안겨 주면서 발급해주고 소비를 조장한 적이 있다. 지금도 주변에

는 욕망과 빚에 얽어 매여 노예로 전락한 군상들이 많다. 불과 30년 전 ‘검소하고 근면하게 그리고 저축하자.’던

구호는 이제는 한국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문구가 되었다.
부유하고 여유있게 살고 싶은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켜서 그리고 타인을 타락과 몰락과
빈곤과 죽음으로까지 내몰면서 나의 허영과 탐욕과 환상을 추구하겠다는 철학이나 종교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이제 세계는 물 부족을 이야기하고 환경오염과 PeakOil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도 한때는 인류의 고향이었으나
그 후로 오랫동안 착취의 대상이었던 아프리카와 일부의 아시아 그리고 세계 도처의 소수민족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굳이 그들에게 구호품이나 원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한 번 더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단지 하루가 지났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단지 내가 좋아서 차를 사

서 달린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누군가는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기회를 위하여 양보하고 조

금은 더 걷거나 자중하면 안될까?

 

나는 바람직한 삶이란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고 쉽게 자연과 가까이할 수 있는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

다.

그렇게 친절하고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들 그들의 나라가 범죄와 마약과 빚에 찌들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마치 한

때 사랑했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돌아서서 잊고 지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내 앞에 나타난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솟아나는 연민을 주체할 수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가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다듬어

서 우리 모두는 오감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영겁의 존재들이며 그 존재들은 서로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

고 있는 하나의 큰 존재들이며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끝으로 미국에 살면서 수많은 고뇌와 번민과 갈등 속에서 이글을 쓰기를 주저하시지 않은 저자의 용기와 또한 역자

분의 노고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9/5/‘09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