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의 왼손 투수 장원준은 억울할 법도 하다. 똑같은 날 똑같은 기록을 세웠으면서도 뒷전 신세로 밀려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정 상의 문제로 인해서다. 장원준에게 장난친 운명이 야속할 뿐이다.
지난 4월 24일 장원준과 함께 통산 100승을 거둔 투수는 SK 김광현이었다. 그날 SK는 오후 2시에 NC와 경기를 치른데 비해서 두산은 오후 5시에 한화와 승부를 벌여야 했다. 8이닝 2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된 김광현이 6.1이닝 무자책으로 승리 투수가 된 장원준보다 앞서 100승 고지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한국 프로야구(KBO리그)에서 100승을 거둔 투수는 김광현과 장원준을 포함해서 모두 26명이다. 그중에서 왼손 투수는 송진우(1997, 한화) 해설위원과, 장원삼(2015, 삼성) 등 4명에 불과하다. 김광현이 왼손 투수로는 세 번째로 100승 고지에 오른 투수가 되었으니 장원준은 네 번째 투수로 기록되어야 했다. 게다가 김광현은 좌완 최연소 100승 기록까지 남겼다.
101승도 같은 날 나왔다. 4월 30일 김광현은 고척 넥센 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101승을 올렸고, 장원준도 광주 기아 전에서 6이닝 3실점으로 101승을 거뒀다. 하지만 102승 앞에서는 두 선수 모두 주춤했다. 5월 6일 대구 삼성 전에서 김광현은 7.1이닝 5실점(3자책)으로 패전의 멍에를 짊어졌고, 장원준 역시 잠실 롯데 전에서 5이닝 4실점으로 부진했다.
그 둘이서 운명의 만남을 가졌다. 12일 인천 문학에서는 두산과 SK가 만나 모처럼 진검 승부를 벌이게 된 것이다. 100승을 먼저 빼앗긴 장원준이 설욕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거니와 100승을 먼저 가져갈만한 김광현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더구나 여기서 앞서가는 자가 150승과 200승을 먼저 차지할 가능성도 높다고 할 수 있었다
먼저 위기를 맞은 쪽은 김광현이었다. 1회초 투아웃까지 잡아놓고도 3번 타자 민병헌에게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맞고는 4번 타자 김재환과 5번 타자 홍성흔을 연속 볼넷으로 내보냈다. 2사 만루의 위기. 102승을 장원준보다 먼저 올리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 김재호를 유격수 뜬공으로 잡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장원준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1회말 선두 타자 이명기를 유격수 땅볼로 처리한 후 2번 타자 조동화와 3번 타자 최정에게 연속 안타를 맞았다. 다음 타자는 LG에서 이적한 후 공포의 4번 타자 자리를 꿰어찬 정의윤이었다. 쉽지 않은 상태였지만 정의윤의 타구가 유격수 글러브에 걸리면서 병살로 연결되었다.
먼저 실점한 쪽도 김광현이었다. 2회초 선두 타자 오재원을 볼넷으로 내보낸 후 8번까지 내려앉은 외국인 타자 에반스에게 좌중간 2루타를 맞으면서 두산에게 먼저 점수를 내줬다. 다음 타자 박건우에게도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맞았고 1점을 더 내주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추가 실점이 없었다는 점이고, 그 2점이 이날 경기에서 허용한 실점의 전부라는 점이었다.
두산의 리드는 오래가지 못 했다. 장원준은 2회말 최승준에게 솔로포를 맞은 데 이어 3회말에도 정의윤에게 투런포를 허용하면서 승부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5회에도 1점을 더 내주었으나 1루수 실책이 빌미가 되어 자책점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장원준은 6이닝 4실점 3자책점으로 윤명준에게 공을 넘기고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7이닝 2실점에 머문 김광현이 통산 102승도 먼저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