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심층에 싸인 시의 비밀을 밝혀내는 이어령

‘말’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말’ 그대로 ‘말’에 대한 책이다. 그렇다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그냥 말이 아니다. 오랫동안 사색하고 고뇌한 후에 꺼내는 말이다. 사람의 말이 이토록 품격있고 우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책이었다. 말이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책이었다.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책이었다.

“이 시대의 잠든 지성과 영혼을 깨우는 창조적인 별의 언어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 책의 초판 발간연도는 1982년 11월 15일.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중판인 1983년 5월 25일 발행한 책이다. 어릴 적 교회 전도사님 이삿짐을 날라주고 책장에 꽂혀있던 책 중에 하나를 선물로 받았었는데 이 책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와서 지난 30년을 함께하고 있다.

대수롭지 않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 책은 다소 특이한 구석이 있다. 1972년 ‘문학사상’ 창간호(10월호)부터 시작해서 만 10년 동안 권두언으로 씌인 글을 모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잡지 앞쪽에 나오는 머리말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머리글이 대단해봐야 뭐 그리 대단하다고 책으로까지 묶고 그걸 30년 넘게 간직하고 있느냐고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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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특별하지 않은, 어쩌면 지면을 때우기 위해 그저 형식적으로 쓰이기 마련인 머리말도 이처럼 멋들어지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있어 대단히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것도 누가 하느냐, 혹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머리말만 묶어도 훌륭한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지성(知性)’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가. 그렇다. 이 책의 작가는 이어령이다. 흔히 훌륭한 작가에게 ‘언어의 마술사’니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표현을 붙이는데 나에게 ‘언어의 마술사’나 ‘언어의 연금술사’는 이어령 하나뿐이다. “분노의 주먹을 쥐다가도 결국은 자기 가슴이나 치며 애통해 하는 無力者들을 위하여”로 첫 문장이 시작되는 이 책의 첫 글에서부터 강렬한 전율을 느끼도록 만들었었다.

‘언어로 세운 집’이라는 책에서 오랜 친구를 만난 반가움을 느꼈던 것은 표지에서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일 게다. ‘기호학으로 스캔한 추억의 한국시 32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이어령 교수와 함께 32편의 시를 읽어보고 그를 통해서 시에 대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준다. 입으로 외우던 시를 머리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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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공부하듯이 32편의 시를 차례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시부터 하나씩 골라서 읽는 게 좋겠다. 그러다 보면 다른 시가 궁금해지고 다른 시의 내용이 알고 싶어질 것이다.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또는 윤동주의 ‘서시’처럼 굳이 해부하지 않아도 좋은 시가 있는 반면, 그 속을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시도 있다. 대표적으로 난해한 시라고 할 수 있는 이상의 ‘오감도’가 그렇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로 유명한 이 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혹자는 ’13’이란 숫자에 대한 집착으로 예수의 최후 만찬과 결부시키기도 하고, 혹은 조선 13도(道)의 숫자와 관련지어 풀이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어령은 시는 정답을 감추어놓은 퀴즈 문제가 아니라 침을 놓듯이 시 전체의 신경망 그리고 상호 유기적인 상관성에서 시적 언어의 혈을 찾는 작업이라며 명쾌한 해석을 제시한다. 그제야 ‘오감도’가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19년 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덧칠하지 않고 그대로 수록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신문의 제한된 지면으로 많은 부분을 어쩔 수 없이 삭제하거나 요약할 수밖에 없어서 책으로 낼 때는 보완 보충하리라 생각하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그리고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뜰의 신비한 체험을 얻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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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누나야 – 김소월, 시의 숨은 공간 찾기
진달래꽃 – 김소월, ‘사랑’은 언제나 ‘지금’
춘설(春雪) – 정지용, 봄의 詩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광야 – 이육사, 천지의 여백으로 남아 있는 ‘비결정적’ 공간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오직 침묵으로 웃음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봄과 여름 사이에서 피어나는 경계의 꽃
깃발 – 유치환, 더 높은 곳을 향한 안타까운 몽상
나그네 – 박목월, 시가 왜 음악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향수(鄕愁) – 정지용, 다채로운 두운과 모운이 연주하는 황홀한 음악상자
사슴 – 노천명,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생명의 알몸뚱이
저녁에 – 김광섭,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
청포도 – 이육사, 하늘의 공간과 전설의 시간을 먹다
군말 – 한용운, 미로는 시를 요구하고 시는 또한 미로를 필요로 한다
화사(花蛇) – 서정주, 욕망의 착종과 모순의 뜨거운 피로부터
해 – 박두진, 해의 조련사
오감도 詩 제1호 – 이상, 느낌의 방식에서 인식의 방식으로
그 날이 오면 – 심훈, 한의 종소리와 신바람의 북소리
외인촌 – 김광균,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에 숨어 있는 시적 공간
승무(僧舞) – 조지훈, 하늘의 별빛을 땅의 귀또리 소리로 옮기는 일
가을의 기도 – 김현승, 죽음의 자리에 다다르는 삶의 사계절
추일서정 – 김광균, 일상적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언어
서시 – 윤동주, ‘별을 노래하는 마음’의 시론
자화상 – 윤동주, 상징계와 현실계의 나와의 조우
국화 옆에서 – 서정주, 만물이 교감하고 조응하는 그 한순간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시적 상상력으로 채집한 언어의 표본실
The Last Train – 오장환, 막차를 보낸 식민지의 시인
파초 – 김동명, ‘너 속의 나’, ‘나 속의 너’를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
나의 침실로 – 이상화, 부름으로서의 시
웃은 죄 – 김동환, 사랑의 밀어 없는 사랑의 서사시
귀고(歸故) – 유치환, 출생의 모태를 향해서 끝없이 역류하는 시간
풀 – 김수영, 무한한 변화가 잠재된 초원의 시학
새 – 박남수, 시인은 결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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