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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을 읽고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어둠의 세력’을 읽고
우선 기쿠가와 세이지 선생님과 번역해 주신 김정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79년 3월 금문교를 지나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근교의 Venecia에 상륙을 했었다. 그로부터 약 5
년 정도 미국의 동부와 서부의 많은 항구도시들을 외항선 선원으로 드나들었었다. 바로 작가가 관광객으로 방문했
을 때 느꼈던 놀라운 미국을 나도 체험하고 있었다. 1984년 12월 22일 성탄절을 앞두고 루이지애나의 Lake Charles
에서 약 10개월간 근무했던 M/V Pacific Hunter호에서 하선을 해서 성탄절 전야에 귀국을 했다. 2년 정도 다시 공부
를 시작해서 의과대학에 입학한 후 오랫동안 미국 소식은 단지 대중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것이 전부였고 학교생활
에 파묻혀서 거의 바깥 세계는 잊고 살았었다.
2001년 8월 3일부터 8월 18일까지 본교가 자매 결연을 맺게 되어서, 교수대표로 학생들과 함께 아비시나(Avicenna)
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의 부하라(Bukhara) 의과대학을 방문하여서 약 700여권의 의학
서적을 전해주고 현지 팀과 함께 타슈켄트(Tashkent) 근교의 농촌에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너무도 한국의 시골과 유
사한 경관에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부하라(Bukhara)는 승원(僧院)이라는 뜻을 지닌 도시로서 구소련에서 유일하
게 이슬람신학교인 ‘미르 아라프 메드레세’가 남아있던 유서깊은 이슬람 도시였으나 모든 분들은 친절하고 순박했
다. 또한 한국의 드라마가 방영되어서 나도 알지 못하는 ‘현이와 덕이’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미국의 9.11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생생하게 접하게 되었고 그간에 여러 방송국에서 제작된 다
큐멘터리도 보아왔다. 1997년 겨울 한국에 IMF가 왔을 때도 서울의 한 호텔에 칩거하면서 막후에서 진두지휘를 하
고 청바지 차림으로 사라진 미국의 재무부 소속 직원을 제외하고는 다소 석연치않다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뚜렸이 잡
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2007년 11월 미국의 Subprime Mortgage 사태가 발생하고 그 내막이 밝혀지면서 그간의 Wa
ll Street를 비롯한 세계금융시장이 얼마나 부패하고 모순투성이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 령 암살은 링컨과 케네디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였고 링컨은 노예해방 때문에 케네디는 흑인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0여년의 세계 역사의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한 이들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저자의 역작을 읽게 되면서
그동안 풀리지 않은 많은 사회현상과 의문들이 마치 수없이 흩어져 있는 염주들을 하나의 실에 꿰차듯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글을 읽는 중간 중간 너무도 황당하고 허구라는 느낌이 들어서 ‘youtube 동영상 링크’를 실제로 확인해보았다. 그
중에 ’Aaron Russo: Rockfeller knew about 9/11 well in advance’는 삭제되고 없었다. 그 외의 ‘Aaron Russo – Ar
chitecture Of A Prison Planet (Pt. 4)’, ‘Bush can’t answer an important question, George bush doesn’t kno
w what to say’, ‘Lt. Col. Bo Gritz claims CIA drug dealing, July 1988’의 자료들은 아직 온라인상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상기의 어둠의 세력들은 일개 대통령이나 미국의 정부보다 더 상위에서 무소불
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자신들의 탐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획책을 일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징후가 내 주변에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돌이켜 보면 이미 197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
다. 그 당시 우리나라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하루에 일인당 물을 30리터 이상 소비해야 문화인으로 분류된다는 내
용이 있었다. 그 당시 한국의 시골에는 집집마다 ‘물두멍’이라고 해서 약 20-30 리터 되는 단지를 부엌에 두고 어
머니들이 매일 새벽마다 물동이로 우물을 퍼서 머리에 이고 날라서 8명의 식구가 사용하거나 조금 사정이 나은 집
은 우물을 파서 사용하였다. 어쨌든 그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범주에 따르면 문화인이 아니었다. 그 당
시 영어 독해 내용에 미국은 자동차가 일반화 되어서 약 100 마일 떨어진 곳까지는 이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야말
로 ‘소비가 미덕’이라는 사악한 구호였다. 한때 ‘어느 샐러리 맨의 죽음’이라는 연극이 상연되어 화제가 되었
을 때도 우리들은 그 제도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동경하고 있었고 지금도 우리들은 그 주
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92년 의학과 4학년 자습실에 모 카드회사에서 찾아와서 소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발급주기 시작해서
그 후로는 시내곳곳에서 신용카드가 사은품까지 안겨 주면서 발급해주고 소비를 조장한 적이 있다. 지금도 주변에
는 욕망과 빚에 얽어 매여 노예로 전락한 군상들이 많다. 불과 30년 전 ‘검소하고 근면하게 그리고 저축하자.’던
구호는 이제는 한국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문구가 되었다.
부유하고 여유있게 살고 싶은 욕구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켜서 그리고 타인을 타락과 몰락과
빈곤과 죽음으로까지 내몰면서 나의 허영과 탐욕과 환상을 추구하겠다는 철학이나 종교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이제 세계는 물 부족을 이야기하고 환경오염과 PeakOil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도 한때는 인류의 고향이었으나
그 후로 오랫동안 착취의 대상이었던 아프리카와 일부의 아시아 그리고 세계 도처의 소수민족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굳이 그들에게 구호품이나 원조를 하지 않아도 좋다.
한 번 더 먹을 수 있는 요리를 단지 하루가 지났다고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단지 내가 좋아서 차를 사
서 달린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누군가는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기회를 위하여 양보하고 조
금은 더 걷거나 자중하면 안될까?
나는 바람직한 삶이란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있고 쉽게 자연과 가까이할 수 있는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
다.
그렇게 친절하고 순박하고 정직한 사람들 그들의 나라가 범죄와 마약과 빚에 찌들어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마치 한
때 사랑했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돌아서서 잊고 지내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내 앞에 나타난 그녀의 초라한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솟아나는 연민을 주체할 수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우리 모두가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다듬어
서 우리 모두는 오감의 세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영겁의 존재들이며 그 존재들은 서로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
고 있는 하나의 큰 존재들이며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끝으로 미국에 살면서 수많은 고뇌와 번민과 갈등 속에서 이글을 쓰기를 주저하시지 않은 저자의 용기와 또한 역자
분의 노고에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9/5/‘09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서평**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2’을 읽고
***서평***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2’을 읽고
우선 저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를 드리면 저는 1960년 경북 문경(점촌)에 태어나 고교는 대구에서 그리고 목포에
서 해양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부터 84년까지 외항선 기관사로 근무한 후 1985년은 1년간 시골집에서 공부를 하
고 1986년 1년은 서울 대성학원에 다닌 후 1987년 부산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1993년 졸업 후 의사가 되
고 동대학원에서 의학석사(약리학 전공) 의학박사(면역약리학 전공)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모교의 약리학교실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소년기에는 학문(art)을 배워야 하고 청년기에는 욕망(kama)을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하며 중년을 지나면 비로소 법
(darhma)을 체득하여야한다.” Brahman을 가르치는 교재의 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어제 약 10시간에 걸쳐서 이 책을 읽고 여느 때처럼 저녁 산책을 하면서 리뷰를 구상하다가 떠올린 구절입니다. 우
리들의 삶을 풍요하고 유익하게 이끌어 주시고 계시는 많게는 저보다 약 25년 선배님들부터 적게는 약 25년 젊은,
서른 분들께서 펼쳐 보이신 진솔한 삶의 모습에 깊은 감동과 고마움을 느낍니다. 또한 TV 등의 대중매체에서 보는
현실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훨씬 역동적이고 희망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또한 시골 출신이라 60년대 후반 그리고 70년대 초반에는 여러 분들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교과서 외에는 책
이 참 귀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용돈으로 만화책을 어쩌다 사면 어머니께서는 모두 엿장수에게 주셨습니다. 대구
로 고교에 진학한 후에는 주말이면 그 당시 대구 시청 앞과 남문시장에 100여 곳은 족히 되었던 헌책방을 참 많이
도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읽었던 책이 ‘논어’ ‘어사박문수’ ‘미운 오리 새끼’ ‘젊은 그
들’ ‘돈키호테’였습니다. 그야말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키우던 때였습니다.
또한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가난을 해결하고 바깥세상을 둘러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외항선 기관사가
되었습니다. 승선 근무를 하던 중에 Raymond A. Moody 박사의 ’Life after life’를 읽게 되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
는 것은 ‘사후에도 삶은 계속되며 다음의 생까지 타인에게 행한 선(善)과 익히고 깨달은 지식은 지니고 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가난을 해결하기 위한 부의 축적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리
고 다시 의과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의학과 3학년 때 동료의 서가에서 알게 된 책이 Viktor E. Frankl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en’s search for mea
ning)’였습니다. 의학과 1학년 때 선친께서 별세하시고 막내 동생은 한의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저도 학생이었지만
막내의 생활비와 등록금을 해결해 주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내용
이 너무 가슴에 와 닿고 위로가 되어서 책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구절들을 일일이 카드에 필사를 해서 식사를 하면
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그 무엇도 이전의 가족들과 가졌던 추억과 기억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는 구절
은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의과대학 졸업을 앞두고 학생들의 사은회에 가서 몇 마디 축사를 하는 경우에는
꼭 “앞으로의 수련생활이 어렵겠지만 자신의 명예와 품위를 지키라.”고 당부를 하곤 합니다.
많은 분들께서 지적하셨듯이 단 한권의 책이 인생의 전체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그
마한 변화가 축적되어서 삶은 더욱 충실하고 풍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통해서 저자들의 영혼으로부터 우리들
에게 쏟아지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이상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받게 되는 것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글을 써 주신 많은 분들께서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제가 6년 전 한국해양대학교에
서 동남아시아를 순방하는 원양항해 실습선 ‘M/V 한나라’ 호에 선의(Ship’s Doctor)로 한 달 정도 초빙을 받아서
간 적이 있었는데 생도들에게 훈시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해준 연설 중에 “결코 쉽게 이루지 못할 만큼 큰 꿈
을 품도록 하십시요. 그리고 그것을 빨리 실현해야 하겠다고 조바심내지 마십시오. 그러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 결코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계속하는 한 언젠가는 여러분의 꿈을 가득 실은 배
가 여러분들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라고 치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저도 명을 아는 나이(知命)가 되었습니다. 주변의 상황을 보면 공병호 선생님과 박현정 선생님의 자신의 계발
에 충실해서 ‘홀로서기’를 준비하라는 가르침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또한 문용린 교수님의 ‘부유한 노
예’에 대한 견해는 습관적으로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1992년 MS-DOS를 사용하는 컴퓨터로 진단방사선과 보고서를 작성하여 dot printer로 인쇄하여 제출하기 시작해서 19
94년 Macintosh LC 475 기종으로 석사논문을 작성하고 1996년 의과대학에 HDD 1 giga bytes의 컴퓨터와 인터넷이 설
치된 이후로 3권의 노트북과 6대의 데스크탑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고 분자생물학의 발달과 더불어 생명공학과 의
학의 발전으로 방대한 량의 정보가 매일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삶에서 본원적인
평화와 자유를 누리는데 필요한 중요한 정보와 지식은 일반인들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영섭 선생님의 의
식의 문이 열리는 체험과 C. G. 융의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Man and his symbol)’이 시사하는 바는, 조성기 선생님
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en’s search for meaning)’에서 “인간 존재의 무한한 뜻은 고뇌와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아우슈비츠라는 혹독한 상황에서 인간의 선(禪)적인 사유가 다다를 수 있는 깨달음의 극치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병호 선생님께서 “자신을 제어하는 일을 준(準)종교적인 차원까지 끌어 올리게 되면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된
다.”고 하는 지적은 매우 공감이 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영겁의 존재들이며 이미 자유롭고 구원되어 있으며 있는 그대로 모두가 깨달은 분들이기 때문입니
다.
감사합니다.
8/5/‘09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
봄비 오는 뜰에서
봄비 오는 뜰에서 2009/02/14 17: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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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해무가 자욱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아침이면 North Carolina Wilmington 부근 해역의 악천후 속에서 배가 육지에 좌초될 것 같다는 다급한 3항사의 전화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하다.
지구의 자전 때문인지 Pacific Northwest 해안의 파도는 특히 치명적이다. 심야에 도선사가 조그만 pilot boat로 옮겨 타는 것을 보면 곡예가 따로 없다. 뱃전에 기대어 항해를 하다 보면 삶에서 1m 떨어진 곳에 죽음이 항상 따라 다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그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호흡이다. 그러므로 몸에 갇혀 있고 호흡에 자유롭지 못한 한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물을 알지 못한다. 물속으로 돌을 던지면 그 돌은 결국 땅 위에 있게 된다. 우리의 대부분의 고뇌는 ‘나’라는 생각 때문에 나타난다.
연잎이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흙탕물이 없으면 연꽃이 필 수 없다. 그러므로 흙탕물과 연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이 모든 우주가 물리량의 합이 0(空)인 무한소에서 출발했다면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몸은 새장과 같다. 새장 밖에서는 하나를 차지하고 싶어 하지만 새장 안에 좀 살다가 보면 새장 밖으로 가보고 싶어 한다. 우리들은 몸이라는 옷을 벗을 때 보다 더 큰 진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연히 참모습을 보게 되면 그대로 본래와 하나가 되며 더 이상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도 있다.
아이를 닮은 아버지
잠자기 전에 어둠 속에 다가와서 아들 녀석이 내 두 볼을 잡고는 “아이구, 귀여워라!” 하고 속삭인다.
재산은 놓고 가고 건강도 결국은 찾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선업과 깨달음의 체득이다.
한마음 같은 하나의 물방울인 이 세계에서 잠시 떨어져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평화와 고요가 온다.
꿈은 오관은 쉬되 의식이 쉬지 못하는 것이며 숙면은 호불호에 민감한 7식까지 쉬는 것이다.
2/14/’09 酉時 |
영혼의 진화
영혼의 진화 2009/01/28 06:38 | 추천 2 스크랩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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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생사를 넘나드는 기능적 실체이다. 그러므로 죽거나 눈멀거나 귀먹은 마음은 없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졸업처럼 새로운 시작이다.
비록 눈물을 흘릴지라도 수고로움 때문에 고뇌하지 말자. 우리 모두가 걸어가고 있는 길의 끝에는 평화와 안식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들의 삶은 마음이라는 스피커 대신 육신이라는 이어폰을 꼽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육신을 떠나면 우리의 인식과 지각은 시공의 제한에서 자유로워진다.
아마도 우리들의 생각은 microtubule을 구성하는 tubulin nucleon의 spin-up과 spin-down이 중첩된 형태로 존재하는, 확률밀도함수의 붕괴에 의하여 전의식의 바다로부터 의식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 같다.
본 바가 없으면 분별이 없고 들은 바가 없으면 시비가 없다. 그러므로 당나귀가 가기 전에 온 말에는 콧구멍이 없고 뜰에 자목련이 피니 돌부처 얼굴을 붉히는구나.
1/28/‘09 丑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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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바닷가에서
우주의 바다에 떠다니는 별빛을 바라보노라면
모든 물이 바다로 맞닿아 있듯이
강물처럼 흐르는 영원과 무한 속에
일체가 한 마음에 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18/‘09 寅時
분별을 낼 때만
분별을 낼 때만
마음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물들지도 않고 받아 지닐 수도 없는
한마음을 거짓으로 자성이라 한다.
1/18/‘09 寅時
분별을 내면 마음이 나타나듯이
분별을 내면 마음이 나타나듯이
사건의 인과가 존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내지 않으면 부처도 사라진다.
1/17/‘09 酉時
사물의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
측정할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찾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는다.
1/18/‘09 寅時
생사는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다.
진정으로 well-dying을 추구한다면
사후의 모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1/18/‘09 寅時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모두가 외로운 사람들
이제 戊子년 한해도 사흘이 남았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상처받고 외로움에 떠는 영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일수록 따스한 햇살과 맑은 달빛 아래서 자신의 마음을 잘 갈무리하셔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을 유지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주변에 숨겨져 있는 보물들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중 송도 바닷가의 여명과 일출 그리고 감천과 을숙도의 석양과 일몰
그리고 산책로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뜰에서 내려다 본 송도의 모습입니다.
왼쪽이 태종대이고 오른쪽이 암남공원입니다.
일출 모습입니다.
저녁에 들르는 산책로입니다.
올해 여름 송도와 영도를 잇는 남항대교가 개통되었습니다.
산책로 초입입니다.
산책로 숲사이로 보이는 남포동과 용두산 공원 모습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마을의 모습입니다.
건너편이 영도의 태종대입니다.
제가 외항선 기관사였을때 근무하던 배도 여기서 waiting을 했었습니다.
산책로의 을숙도 쪽입니다.
감천과 낙동강 하구의 일몰 광경입니다.
지금 보이는 산은 가덕도의 국사봉과 거제도의 일부입니다.
지금 낙조가 있는 곳 아래가 부산진해신항이 있는 위치입니다.
땅거미가 몰려 오기 시작합니다.
수평선 가까이 있는 섬이 거제도의 남단입니다.
산책로의 쉼터입니다.
언제나 하루의 끝은 아름답습니다.
하산길입니다.
새해는 더욱 편안하시고 보람찬 나날들이 되시길 빕니다.
송 도(松 島)
굽어보면 옛 일터였던 태평양의 내해요
돌아보면 언제나 정겨운 백두대간의 한 줄기라
따스한 햇살과 맑은 달빛 아래 고요하니
이 외에 또 무엇을 더 구하겠는가?
우리는 모두 영겁의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강물처럼 흐르는 영원과 무한 속에
서로 하나로 닿아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온전한 깨달음이 숨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영겁의 존재들입니다.
마치 연주된 곡들의 집합 사이에 연주자가 잠시 존재하듯이
사건과 사건의 연결이 존재의 모습입니다.
오감이라는 악보를 볼 때는
자연의 음악이나 악상이 떠오르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오감이라는 악보에 너무 익숙해 있고
때문에 단지 그곳에 머물러 있지요.
12/10/‘08 寅時
On the way to the Kwanum Temple
On the way to the Kwanum Temple 2008/10/06 06:05 | 추천 0 스크랩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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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way to the Kwanum Temple
The cypress tree in front of the garden,
that is the place where it was.
The outside is as usual.
From the beginning,
the Buddha is as it was.
10/5/’08 酉時 |
어항을 뛰쳐나온 금붕어
어항을 뛰쳐나온 금붕어
안타까워라, 무지개를 잡으려는 우리들이여.
왔다고 하나 온 바도 없고 갔다고 하나 간 바도 없거니
그저 고요히 차나 한잔 다릴 것을
오늘도 허깨비 가면 춤에 울고 웃는 우리들이여.
10/5/‘08 卯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