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푼탄 사바네타(Puntan Sabaneta: 작은 초원)’는 사이판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멋들어진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드넓은 바다는 코발트빛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투명했고 파도가 절벽에 부딛히며 토해내는 포말은 더없이 신선했다. 이런 빛의 바다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듯 신기하기만 했고 이제서야 비로서 남태평양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아름다운 곳이지만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수천 명의 일본군이 미군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80m 높이의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뛰어 내린 일명 ‘만세 절벽(Banzai Cliff)’라는 곳이다. 이곳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서 병사들은 “천황폐하 만세(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만세절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전쟁의 광기가 수 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의 바다로 내몰았던 것이다. 만세 절벽 앞의 마리아나 해구의 깊이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14,000m라고 한다. 그야말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곳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만세절벽’에서 뒤로 보이는 내륙쪽에 또 하나의 절벽이 보이는데 이곳의 이름은 ‘자살절벽(Suicide Cliff)’으로 여기에도 기구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일본군 병사들이 만세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있을때 그들의 가족들 또한 미군의 포로가 되어 험한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며 절벽에서 몸을 내던졌는데 이곳이 바로 ‘자살절벽’이다.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미군의 방송에도 불구하고 자살행렬이 끊이지 않자 미군 함대에서는 절벽을 향해 대포를 쏘아 도망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의 대포 자국이 아직도 절벽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한국인 위령탑’처럼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세워놓은 충혼탑이 있다. 그들도 그들 방식대로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전범이자 강제 징용으로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가해자들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들이 충혼탑에 껌을 붙이기 시작했단다. 그러자 일본측에서는 경비원으로 감시하게 하였고 이제는 충혼탑에 껌을 붙이다 경비원에게 들킬 경우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씁쓸함이 몰려온다.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는데 바로 수평선이 둥글다는 점이었다. 국내에서는 수평선이 평평한 일직선인데 비해서 이곳 사이판에서는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이 일직선이 아니라 둥근 원을 그리고 있었다. 적도와 가깝기 때문이란다. 사실 이곳 만세절벽은 두번째 방문이었다. 첫번째 방문은 15년전 신혼여행으로 왔었는데 그때는 날이 흐리고 비가와서 이토록 좋은 경치를 간직하고 있는 곳인지 미처 몰랐었다. 하지만 이번 방문을 통해서 맑은 하늘과 푸르른 바다를 만나게 되니 새삼 사이판으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상사 모든게 궁합이 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