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의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었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나와 벤츠 택시를 잡고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로 향했다. 베를린 웰컴카드를 샀으므로 버스나 지하철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지만 짧은 여정을 고려하면 돈보다는 시간을 절약하는 편이 더 현명하겠다 싶었다. 박물관 후문에서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까지는 약 9유로 정도의 비용이 나왔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이르니 초로의 택시 기사는 어디에서 내리겠느냐고 묻는다. 전승기념탑 지게스조일레에 올라갔다 오느라 오전부터 파김치가 되어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으므로 중간 정도에 내렸으면 좋았을 것을 어느 정도 규모인지 모르는 터라 초입에서 내리고야 말았다. 그때까지는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길이가 그 정도로 길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작품들을 감상하며 걷다가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는데 어느 신혼부부의 웨딩마차가 그것이었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들러리 둘을 합쳐 네 명이 오픈카 형식의 마차를 타고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도로를 거닐고 있었다. 손에는 샴페인 잔을 들고 시종일관 즐거운 모습으로 떠들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괜찮은 추억거리가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가 특별한 것은 이곳이 한때는 자유와 억압, 그리고 희망과 절망을 가로질렀던 베를린 장벽이라는 점에서다. 1989년 11월 9일 독일의 통일과 함께 베를린 장벽은 철거되었지만, 이곳만은 예술작품으로 남아있다. 처음에는 프랑스인 2명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를 계기로 21개국 118의 작가들이 참여해 지금의 갤러리가 완성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갤러리인 셈이다.
작품 수준은 편차가 있어 보였다. 대단히 잘 그렸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있는 반면 낙서처럼 보이는 작품도 없지는 않았다. 어차피 재능기부 형식이고, 대단한 작품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일종의 실험 정신이 가미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만,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방문자들의 낙서로 얼룩진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중간에 잠깐 장벽이 끊어진 곳이 나오는데 그제야 장벽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장벽 이쪽의 사람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모습이었으리라. 장벽을 따라 걸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장벽 없는 세상과 마주하고 보니 두꺼운 장벽에 둘러싸인 세상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아무리 예술작품으로 장식했어도 장벽은 장벽이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작은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여기에 작은 비밀이 하나 숨어있다. 동독과 서독이 예전에 사용하던 여권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종류는 4가지로 한번 찍는데 1유로를 지불해야 한다. 아는 사람만 간직할 수 있는 기념품이라고 하겠다. 물론, 우리는 다녀와서야 알았다. 그 길 건너편에 있는 이스트 사이드 호텔 외벽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우리 눈에는 다소 음란스럽고 남사스럽게 느껴진다.
도로 쪽 벽이 예술작품을 위한 공간이라면 강가 방향 벽은 세계의 장벽들을 위한 사진 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의 휴전선 모습도 볼 수 있다.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전쟁의 참상과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게 된다. 다만, 그 반대편에 있는 벽화를 보려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길 끝에는 거리의 악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무작정 걷기 시작했는데 길이가 무려 1.3km에 달한다고 한다. 체력이 남아있다면 산책 삼아 걸을만한 거리이기는 하나 이미 방전될 대로 방전된 데다 점심때를 놓친 후라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그 상태로 작품이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키스 장면을 그린 그 유명하다는 ‘형제의 키스’를 찾아보았지만 가도 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반대편에 있었던 듯하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말은 언제나 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