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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동독과 서독을 가르던 검문소, 체크포인트찰리 - Journeyman이 바라본 세상
동독과 서독을 가르던 검문소, 체크포인트찰리

체크포인트찰리

죄를 지었건 그렇지 않건 검문소 앞에서는 언제나 긴장하게 된다. 혹시라도 통과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 때문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도 그럴진대 자유를 찾아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베를린 장벽 검문소 중의 하나인 ‘체크포인트 찰리(Haus am Checkpoint Charlie)’를 찾아가면서 일종의 비장함까지 느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체크포인트’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사이에 설치된 연합군 측 세 개의 검문소를 말한다. 우리식으로 하면 ‘공동경비국역 J.S.A’라고 할 수 있겠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를린으로 네 구역(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으로 나뉘었고 1961년 8월 13일에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의 경계선이 막히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철조망이었으나 나중에는 높은 콘크리트 벽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처음에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의 통행 제한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 주민들이 돌아오지 않는 일이 많아지자 철조망으로 이동에 제한을 주기 시작했고 그래도 철조망을 넘나드는 일이 줄지 않자 동독에서는 동과 서를 완전히 분리하는 콘크리트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 이 베를린 장벽은 한동안 동서 냉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미군이 운영하던 검문소였다. ‘찰리’는 알파벳 ‘C’를 의미한다. 이는 발음에서 오는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함인데 ‘A’는 ‘Alpha’, ‘B’는 ‘Bravo’로 불렸다. 즉, ‘체크포인트 알파’는 프랑스가 담당하는 검문소였고, ‘체크포인트 브라보’는 영국이 담당하는 검문소였던 것이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1961년 8월에 설치되었다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1990년 6월에 철거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이 연합군에 의해 4개 구역으로 나뉘었듯이 베를린 또한 4개 구역으로 나뉘어졌는데, 그동안 몰랐던 사실 가운데 하나는 베를린이 동독 구역인 브란덴부르크주 한가운데에 있다는 점이었다. 즉, 서베를린은 동독 지역에 남겨진 외딴섬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동베를린 시민과 달리 자유를 누리고는 있지만 서베를린 시민들이 느꼈을 불안도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체크포인트 찰리’에서는 몇 차례 대담한 탈출 시도가 벌어졌는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에 의하면 1962년 탈출하다 실패한 페터 페히터 사건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그는 총을 맞고 철조망 부근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채로 방치되어 죽었고, 이 모습이 전 세계 미디어에 보도되어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현재 베를린에 남아있는 ‘체크포인트 찰리’는 철거된 지 10년이 지난 2000년 8월에 복원된 것이다.

이곳은 예전처럼 군인들이 검문소를 지키고 있는데, 그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려거든 1인당 2유로를 내야 한다. 성조기를 좌우에 두고 두 명의 군인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12유로를 내면 자신의 여권에 서독과 동독의 스탬프도 찍을 수 있다. 독일과 베를린에 대한 색다른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기회이기는 하나 지나치게 상업화되었다는 점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체크포인트 찰리’로 가는 길에는 베를린 장벽과 관련된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방문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구 동독 시절의 기념품을 파는 노점이나 매장도 있으므로 재미난 기념품도 득템할 수 있을 것이다. ‘체크포인트 찰리’ 옆에는 ‘장벽박물관(Haus am Checkpoint Charlie)’이 있으므로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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