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을 잃지 않은 방황은 항상 삶을 풍요롭게 한다.
– ‘너의 이름보다는 꿈을 남겨라’의 이병철 회장 전기를 읽고.
꿈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저의 꿈 이야기를 조금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3월 18,19일 양일간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대구가톨릭대학교의료원 주최로 ‘2010 생명의학연구윤리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오랜만에 대구에 와서 학회일정과 금호강 주변의 경관과 예술품들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금요일 오후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에 도청에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서 지난 2년 동안 문제가 되고 있는 시골의 도시개발계획에 강제 수용될 위기에 처한 농지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간의 서류와 내용증명 그리고 답신을 훑어보던 친구는 모든 의견의 표시는 서류로 하고 전결사항은 직접 책임자와 면담신청을 해야 하며 단체로 모여서 의사전달을 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직접 도청의 담당과에 전화를 해서 면담을 주선해준 친구에게 사의를 표하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토요일 오후에 6학년인 딸의 부산 사하구 영재교육원 입학식이 있어서 낙동초등학교에 가는 차안에서 배달된 책을 펼쳤다. 고교 시절부터 누구보다도 오랜 방황과 많은 좌절을 겪어 보았던 나는 책을 읽어 갈수록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월요일 새벽에 자료를 첨부하여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 신청을 한 후에 시골의 시장님과 면담 신청을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서실의 안내로 도시과에서 면담을 하였다. 30분 이상 그간의 서류를 놓고 따져서 결국 시청에서 도지사의 조합 승인 신청 시에 올려야 할 토지소유자들의 반대의견이 묵살되었다는 것을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이전에 시에서 재정이 없다고 해서 77평의 땅을 1,600만원에 도로 부지로 쓰라고 시에 매도하니까 세무서에서 ‘왜 엉터리로 매매 계약을 하였냐?’고 다그치길래 ‘시에 재정이 없어서 그랬다.’니까 ‘좋은 일 하셨다고 돌아가시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신들은 주민들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시의회의장이라는 사람이 도시개발조합장을 겸임하면서 ‘정관’을 의결정족수도 되지 않는 것으로 허위로 통과시켜 놓고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느라고 평생 농사만 짓고 있는 촌부들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있다.”고 소리쳤다.
도청 도시계획과와 변호사사무실을 들러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차안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고 그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한 탐관오리와 토착향리들의 횡포와 횡행은 아직까지도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사담을 구구하게 한 이유는 책을 읽어 가면서 나는 호암 선생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배신감에 대한 분노를 마치 내 일처럼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깊은 위로와 희망을 맛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한국의 발전에 호암 선생의 희생과 기여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삼성에 대하여 겪은 두 가지의 인상적인 경험이 있는데 하나는 1997년 여름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터어키의 서단 즉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스의 섬들을 여행하는 중에 파묵칼레의 day tour team에 Colombia에서 온 커플은 panasonic 흑백 캠코더를 가지고 촬영을 하고 있었고 나는 삼성 칼라캠코더로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온 노부부가 물끄러미 보더니 어디서 만든 것이냐고 물어서 Korea라고 하니까 훌륭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996년 겨울에 집사람이 레지던트로 근무하던 서울 병원에서 공동구매를 하였다면서 Sens 500 노트북을 보내왔다. CD-ROM이 작동되지 않아 서비스를 요청했는데 기사가 작동을 시키자 전선 타는 냄새가 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잠시 다녀오겠다며 30분 후에 다시 온 기사는 새로운 드라이버로 교체해 준 후에 부품의 오류라며 수리가 다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서비스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그 후에도 한권의 노트북과 4개의 데스크 탑을 삼성제품으로 구입했다.
지금도 삼성을 비롯한 유수의 전자제품에 대한 사후보증제도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좋은 점을 공직자들도 좀 본받았으면 한다. 그것이 결국은 자신과 나라 발전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호암 선생의 유언은 ‘사업보국(事業報國)과 목계(木鷄)’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건희 회장의 걷는 모습은 영락없는 목계이다.
부유한 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지만 평범하고 안온한 삶을 거부한 그리하여 더 많은 세파와 고뇌와 배신과 좌절을 겪어야 했던 그러나 자신의 꿈과 이상을 추구하여 우리들에게 희망과 풍요를 안겨준 호암 선생의 업적과 삶을 돌아보며 깊은 감사와 존경의 염을 금할 수가 없다.
며칠 전 66세라고 밝힌 택시 기사분이 “요사이는 자식 놈들도 하는 짓거리를 보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죽을 때까지 재산을 가지고 있다가 남는 것은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젊은 놈들이 죽으라고 고생하고 전쟁 겪으면서 노력해서 잘 살도록 만들어 주니까 저희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노인들을 우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들도 그러했을 터이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너무도 유약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역경과 좌절을 헤쳐 나가려는 투지가 없고 무엇보다 노동운동은 좋아하나 노동을 싫어하는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고 투지와 야망을 불태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비료’는 지금은 ‘삼성정밀화학(주)’인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지만 한국비료를 이러한 방식으로 위계에 의하여 사유재산을 몰수한 것에 대하여는 결코 지울 수없는 너무도 크나큰 과오라고 생각한다. 또한 수년전 이건희 회장이 중국에서 언론에 ‘청치 3류 기업 2류’라고 하여서 물의를 일켰던 심정적인 배경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이 글은 1910년 이후의 현대사의 격동기에 많은 굴곡과 사건들이 개인의 삶과 얽혀 가는 과정이 비교적 담담한 작가의 필치에 녹아 나오고 있으며 망국의 젊은이가 감수해야 하는 좌절과 도전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져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해방, 6.25, 4.19, 5.16,을 거치면서 전개되는 마산정미소, 히노데 자동차회사 인수, 김해일대의 농지 매수의 실패, 1938년 삼성상회, 조선양조 인수, 부산에서의 삼성물산주식회사, 1953년 제일제당주식회사, 1954년 제일모직주식회사, 1967년 한국비료공장완공 및 국가헌납, 1983년 반도체 공장 제1라인 걸설 등 사업의 흥망과 반도체 산업에 대한 집념과 결실에 대하여 많은 지혜와 용기 그리고 호암 선생의 불굴의 투지가 너무도 또렷이 그려져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서 노련한 삶의 혜안과 따뜻한 조국애를 느낄 수 있었다.
한때 ‘짐을 싸서 잘 포장해두면 가방 들고 가는 놈이 있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고 한다. 혼신의 힘과 재력을 쏟아 부어서 만든 한국비료를 빼앗기는 호암 선생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6.25때 운전 기사였던 위대식의 도움과 대구의 삼성상회와 양조장에서의 경험이 평생 인재와 신뢰를 중요시하는 경영관이 뿌린 내린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현대의 각박한 인심에 비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생전에 호암 선생은 세 가지 질문을 잘하셨다고 한다. ‘문제는 무엇인가?’ ‘왜 그런가?’ ‘해결책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더 호암 선생님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2010년 3월 24일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교실 이 대 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