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바지에 똥 묻힐 때도 있는 법이다. 아무리 엉덩이에 힘을 주고 안간힘을 써도 비집고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위가 높고 낮고를 떠나, 가진 것이 많고 적고를 떠나, 많이 배우고 못배웠고를 떠나,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바지에 똥을 묻힌 게 아니다. 그 뒷처리를 어떻게 했느냐다.
특급 승진을 앞둔 최창식이 그랬다. 팀원들과 어울려 기분 좋게 술 한 잔 걸치기는 했는데 어쩌다 보니 살인까지 하게 됐다. 죽일 듯이 덤벼드는 상대와 뒤엉키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으면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흔한 말로 정당방위라고 주장해도 무방한 사건이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렇게 처리했을 테지만 지금은 특급 승진을 앞둔 특별한 상황이었다. 물의는커녕 구설수에라도 오르면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낙엽조차 조심해도 부족할 판에 살인이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탄탄대로였던 앞길에 갑자기 먹구름이 짙게 낀 형국이었다. 20년 경력의 강남경찰서 강력계 최창식 반장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연기파 배우 손현주 주연의 ‘악의 연대기'(The Chronicles of Evil, 2015)는 이처럼 난처한 상황에 놓인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더구나 그 난처한 상황은 누군가가 자신을 모함에 빠지게 하기 위한 함정이기도 했다. 영화는 최반장이 왜 음모에 빠지게 되었으며, 도대체 누가 그를 노리는 지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참신한 맛을 내지 못한 채 어디선가 빌려온 MSG로만 버무려져 있을 뿐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새로운 맛이라고는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우연한 살인과 상식에 맞지 않는 뒷처리.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그림자. 어디에선가 많이 본 그림이 아니던가? 그렇다. 지난해 깐느에서 호평 받았다는 영화 ‘끝까지 간다'(A Hard Day, 2013)를 떠올리게 만드는 내용이다.
또한, 너무 뻔하다는 점도 문제다. 스릴러를 자처하면서도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범죄영화라면서 촘촘하게 짜여진 각본이라고 할 수도 없다. 너무 뻔하고 뻔해서 후반부에 밝혀지는 반전조차도 뻔해 보인다. 그나마 반전이라고 한다면 베테랑 형사의 사고 수습이 지나치게 아마츄어스럽고, 한 건 기대하게 만드는 캐릭터인 마동석(오형사)의 역할이 생각보다 작다는 정도겠다.
이 영화는 반전만 들어가면 모든 게 다 용서된다고 생각하고 만든 듯하다. 막판에 가서 짠하고 ‘내가 진짜 범인이지롱’하고 나타나면 모든 관객들이 ‘아이 깜짝이야’라며 화들짝 놀랄줄 알았나 본데, 불행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반전이란 충실한 전반이 있어야만 충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 않고 다소 느슨해 보인다면 합당한 이유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충실한 전반도 없었고, 그렇지 않은 데 대한 합당한 이유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범인이 누구이며 왜 그런 짓을 했는지도 궁금하지 않을 정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너무 뻔하다 보니 제작진이 심어놓은 깜짝 반전은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탄탄한 스토리 보다는 반전만 있으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빚어낸 참극이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럴거면 반전이라도 제대로 만들어 놓기나 하던가.
악의 연대기(The Chronicles of Evil, 2015)
범죄, 스릴러 | 한국 | 102분 | 2015.05.14 개봉 | 감독 : 백운학
손현주(최반장(최창식)), 마동석(오형사), 최다니엘(김진규), 박서준(차동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