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요리계 ‘약방의 감초’, 발사믹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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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든 오리가슴살 요리에100년된발사믹 식초를 떨궈 마무리하는 서울 플라자호텔 이탈리아 요리사 사무엘레 주카씨. 사진은 이경민 기자가 찍었습니다.

발사믹식초(balsamic vinegar)는 이탈리아는 물론 웬만한 서양음식점에서 두루 사용되는 식재료이다. 샐러드에 드레싱으로 뿌려져 나오거나 스테이크 등 고기요리에 소스로 곁들여지는 등 여기저기 빠지지 않는, 서양요리계 ‘약방의 감초’랄까.

이제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서양 음식재료이다. 양식 레스토랑에서 가장 흔히 나오는 샐러드 드레싱이 ‘발사믹 식초 & 올리브오일’이고, 수퍼마켓에서도 국내 업체에서 수입한 발사믹 식초를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발사믹 식초를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드는지, 먹는 방법은 얼마나 다양한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서울 플라자호텔이 이달 30일까지 100년 숙성한 전통 발사믹 식초를 활용한 요리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 호텔 이탈리아 요리사 사무엘레 주카(Zucca)씨를 만나 발사믹 식초에 대해 자세하게 들었다.

나무통에서 최소 12년 숙성시켜야 전통 발사믹식초

발사믹 식초는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Modena)와 레지오 에밀리아(Reggio Emilia)의 전통 생산품이다. 이탈리아말로는 ‘아체토 발사미코(aceto balsamico)’라고 한다. 재료는 포도액이다. 람부르스코 와인에 사용되는 포도품종만을 사용해야 한다.

포도를 압착해 나오는 즙을 끓여 절반 정도로 졸인다. 졸아든 포도즙을 나무로 만든 원통형 통에 담는다. 와인통과 모양이 같다. 하지만 재료가 다르다. 와인통은 오크(참나무)로만 만들지만, 발사믹식초를 담는 통은 오크를 비롯해 밤나무·벚나무·아카시아·뽕나무·물푸레나무 등 여러 목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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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모데나의 발사믹 식초 숙성 창고. 모데나와 레지오 에밀리아오래된 집안의 다락방에는 발사믹 식초를 숙성시키는 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된장, 간장 장독대를 가진 것처럼요. 사진은 모데나발사믹식초컨소시엄으로부터 제공 받았습니다.

이 다양한 목재로 만든 통에서 발사믹식초의 독특한 맛이 나온다. 발사믹식초 숙성창고에 가보면 75ℓ가 들어가는 큰 통부터 10ℓ짜리 작은 통이 줄지어 놓여있다. 처음에는 가장 큰 통에 포도즙을 담아 숙성시킨다. 통 위쪽에는 포도즙을 따라붓는 동그란 구멍이 있다. 구멍은 밀봉하지 않고,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얇은 거즈천 따위로 덮어만 둔다. 숙성고에 사는 효모균들이 포도즙을 식초로 만드는 과정을 차단하지 않기 위해서다.

숙성과정에서 포도즙은 자연 증발에 의해 1년 평균 12%가 줄어든다. 이 포도즙을 옆에 있는 조금 작은 통으로 옮긴다. 포도즙이 담겨있던 통과 새로 옮겨질 통은 서로 다른 목재로 만들어졌다. 이 다른 목재에서 각각 다른 맛과 향이 발사믹식초에 배어든다. 오크는 바닐라향, 밤나무는 산미, 벚나무는 단맛을 더해준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포도즙을 옮겨 담는 과정을 최소 12년은 반복해야 비로소 전통 발사믹식초로 공인받을 수 있다. 색깔과 농도, 풍미가 짙어질 수밖에 없다. 12년은 전통 발사믹식초로 인정받을 수 있는 최소 연한이다. 모데나와 레지오 에밀리아에서는 집집마다 발사믹식초를 만들었고, 지금도 전통이 살아있다. 대를 이어 숙성시킨, 100년 넘은 발사믹 식초를 지붕 및 창고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가문이 적지 않다.

‘전통’이란 말만 붙이지 않으면 제조방식 큰 제약 없어

전통 발사믹식초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이다. 표면은 매끄럽게 반짝였고, 농도는 고약(膏藥)처럼 진하다. 신맛이 공격적이거나 날카롭지 않고 은근하다. 자연스런 단맛과 조화롭게 어울린다. 포도와 사과, 체리, 레몬 등 여러 과일과 바닐라 따위 향신료를 농축시킨 듯하다. 초콜릿을 연상케하는 뒷맛이 길게 여운으로 입안에 남는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먹는 발사믹식초는 왜 이런 맛이 아닐까. 주카씨는 “전통 발사믹식초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가짜란 말은 아닙니다. 이탈리아 법규에 따르면 어떤 식초건 10년 이상된 식초를 ‘일정 비율’만 섞으면 발사믹식초라고 표기할 수 있습니다. 모데나와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규정된 포도로 만들어 12년 이상 숙성시키면 ‘전통(traditional·이탈리아어로는 tradizionale) 발사믹식초’라고 표기할 수 있어요. ‘전통’이란 단어 하나만 붙느냐 붙이지 않느냐 차이 뿐입니다. 일반 소비자는 혼동하기 십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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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호텔에서 이번 행사에 사용한 100년 숙성된

발사믹 식초. 모데나 컨소시엄에서 인정 받은

발사믹 식초는 반드시 이렇게밑이 둥그런 모양에

용량이 100ml인 유리병에 담겨야 합니다. 워낙

귀해서 이렇게 스포이트로 똑똑 아껴가며 사용하죠.

이경민 기자의 사진입니다.

10년 이상된 식초가 어떤 종류인지, 또 얼만큼 섞는지는 생산자의 양심에 달렸을 뿐이다. 그래서 보통 발사믹식초를 보면 색은 보라색이나 갈색이지만 농도는 시럽처럼 진하지 않고 묽은 편이다. 대개 카라멜을 더해 부족한 단맛과 농도를 보충한다. 전분을 섞기도 한다.

주카씨는 “이탈리아에서도 전통 발사믹식초는 맛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엄청난 고가이기 때문이다. 일반 ‘발사믹식초’가 100ml 1병당 5유로(약 7000원)에 팔리는데 비해, ‘전통 발사믹식초’는 10배나 더 비싼 50유로(약 7만원)를 훌쩍 넘긴다. 이번 행사를 위해 플라자호텔에서 들여온 100년된 발사믹식초는 1병 가격이 850유로(약 120만원)이다.

어떤 요리도 뿌리면 맛 살려줘…이탈리아에선 소화제로 먹기도

발사믹식초가 서양요리에서 두루 사랑받는 건 어떤 요리에 곁들여도 그 요리의 맛을 한층 살려주기 때문이다. 주카씨는 “이번 행사에서 내는 오리는 물론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쇠고기 스테이크에도 발사믹식초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운 좋게 전통 발사믹식초를 구했다면 아껴 먹어야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발사믹식초를 다른 맛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뿌려 디저트로 즐긴다. 평범하고 밋밋한 아이스크림도 전통 발사믹식초 두세 방울만 떨구면 고급스런 맛으로 변신한다. 딸기에 발사믹식초와 후추를 살짝 뿌려 먹기도 한다. 파르미자노 등 치즈에 곁들이면 치즈의 짠맛과 발사믹식초의 신맛과 단맛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감칠맛을 증폭시킨다.

주카씨는 “발사믹식초를 가장 잘 음미하고 싶다면 다른 음식 없이 오로지 발사믹식초만 맛보라”고 권했다. 숟가락에 한두 방울 떨궈 맛보는 식이다. 모데나와 레지오 에밀리아에서는 식사를 마친 다음이나 아침에 일어나 공복 상태에서 발사믹식초를 작은 유리잔에 담아 조금씩 홀짝홀짝 마신다. 발사믹식초를 탁월한 소화제이자 장수식품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11월15일자 주말매거진에 쓴 기사의 원본입니다. 구름에

2 Comments

  1. 정지중

    2012년 11월 20일 at 9:47 오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 이예수

    2012년 11월 29일 at 3:48 오후

    발사믹식초에 대한 궁금중이 풀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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