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여왕이 박대통령에게 꿩요리를 대접한 이유는-맛세상

국빈 만찬 메인코스로 꿩 나와
꿩·사슴 등 사냥한 ‘게임 고기’
유럽에선 최고급 식재료 대접
神과 가까울수록 귀하게 취급
이런 식품 등급 이젠 사라졌지만
전통과 관습으로 여전히 굳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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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이달 초 영국을 국빈 방문했다. 대통령이나 총리 등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특정 국가를 방문하면 정상회담 직후 국빈 만찬이 열린다. 국빈 만찬은 초청국이 외빈에게 베푸는 가장 정중하고 호화스러운 연회로, 방문 일정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 지난 7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박 대통령에게 베푼 국빈 만찬 메뉴가 궁금해 찾아봤다.

런던 버킹엄궁 볼룸에서 열린 이날 저녁식사에서 첫 코스인 전채로는 채소크림 소스를 곁들인 송어찜이 나왔다. 이어 둘째이자 메인 코스에는 포트와인에 오렌지와 버터를 넣고 졸여 만든 달착지근한 소스를 끼얹은 꿩 구이가 서빙됐다. 요리에 사용된 꿩은 여왕이 윈저성 왕실 소유 숲에서 직접 사냥해 잡은 것이라고 한다. 후식으로는 초콜릿 타르트(케이크)와 배가 나왔다.

식사에 곁들여진 와인은 모두 다섯 가지로, 국빈 만찬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영국산 로제와인인 ‘카멜 밸리’ 2010년산과 최고급 화이트와인인 프랑스 부르고뉴 ‘퓔리니 몽라셰’ 2004년산, 프랑스 보르도 지역 레드와인 ‘샤토 레오빌 라스카스’ 1989년산과 ‘샤토 시뒤로’ 1997년산이 전채와 메인 코스에 맞춰 나왔다. 후식과는 역시 포트와인(Port wine) ‘폰세카’ 1977년산이 등장했다. 포트와인은 포르투갈에서 생산되는 와인으로, 단맛이 강해 주로 디저트와 함께 나오거나 식후 따로 마신다.

만찬 메뉴에서도 핵심이랄 수 있는 메인 요리로 꿩 요리가 나왔다는 게 한국인에게는 익숙지 않다. 물론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꿩을 꽤 먹었다. 이북지역에서는 냉면 육수의 재료로 꿩을 최고로 쳤다. 하지만 요즘은 꿩이 많은 제주도에 가지 않는 한 꿩요리를 내는 식당도 보기 힘들다. 그러고 보니, 지난 2004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영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여왕이 베푼 만찬에도 꿩이 나왔다. 이때는 꿩이 첫 코스의 수프로 나왔다. 메인 코스로는 버섯을 곁들인 사슴 고기가 제공됐다.

영국 여왕은 왜 한국의 두 대통령에게 두 번이나 꿩 요리를 내놨을까. 서양 요리계에서 꿩고기는 ‘게임(game)’의 하나로 분류된다. 게임은 오락이나 놀이로 흔히 사용된다. 하지만 음식으로서 게임은 인간이 사육해 기른 동물 즉 가축의 고기가 아닌, 사냥을 통해서 구하는 육류를 통칭하는 단어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접대한 만찬의 메인 요리 재료인 사슴 고기도 게임의 한 종류이다. 요즘은 게임 고기를 구입해서 내놓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이번 만찬 때 사용된 꿩을 여왕이 직접 사냥해 구했듯, 호스트가 직접 잡은 게임 고기를 손님에게 접대하는 것이 유럽의 전통이었다.

서양에서는 꿩이나 사슴 같은 게임 고기를 고급 식재료로 여긴다. 과거 유럽에서 사냥은 왕과 귀족들만 즐길 수 있었다. 평민들은 사냥을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고, 이를 어길 때는 엄격하게 처벌했다. 지금은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사냥할 수 있지만, 여전히 시간과 돈이 풍족해야만 즐길 수 있다. 사냥은 자연스럽게 특권층·부유층의 전유물로 인식됐다. 그리고 사냥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게임 고기는 돈 주고도 사지 못하는 귀한 식재료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꿩고기는 게임 고기 중에서도 상위 계층에 속한다. 기독교에 근거한 중세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사물과 인간은 신(神)이 정한 질서 안에 존재한다. 이 위계질서의 꼭대기에는 신이 있고, 바닥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무생물인 바위가 있다. 음식의 가치도 이 위계에 따라서, 즉 음식에 들어가는 식재료가 얼마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가까우냐에 따라 가치가 매겨졌다. 땅에 근접할수록 저급하고, 멀어질수록 고급 식재료로 인정됐다. 식물의 경우는 위계를 나누기가 비교적 쉬웠다. 당근, 감자, 무 따위 뿌리채소가 최저급이고 그 위가 땅 위에서 자라는 채소, 나무에서 자라는 과일은 귀족에게 어울리는 고급 식품으로 봤다.

땅에 뿌리를 내린 식물과 달리, 동물성 식품은 등급을 나누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하늘을 나는 새는 고급 식재료로 대접받았다. 꿩이나 자고새(partridge)는 귀족 연회 주요리 재료로 특히 사랑받았다.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자고새는 평민이 먹기에는 너무 섬세한 맛이니 식용을 금한다’는 법까지 제정했을 정도다. 육류의 경우 돼지는 가장 미천한 부류로 평민에게나 적합하며, 송아지나 양은 중위권, 덩치가 크고 사냥해서 먹는 사슴 따위는 고급 고기로 분류됐다. 같은 재료일지라도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등급이 달라졌다. 예를 들면 로스트(roast) 즉 뜨겁고 건조한 공기로 조리하면 신에게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식품의 위계’가 요즘은 서양에서 거의 잊히고 사라졌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 기준은 관습과 전통으로 굳어져 문화와 생활에 깊게 박혀 있다. 이러한 관습과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영국 여왕이 박 대통령에게 대접한 국빈 만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월21일자 조선일보 오피니언면에 실린 칼럼입니다. 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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