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시즌스(The Four Seasons)는 ‘뉴욕 최고 레스토랑’이란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빌·힐러리 클린턴 부부와 조지 부시 부자,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헨리 키신저, 오프라 윈프리, 워렌 버핏, 배리 딜러,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랄프 로렌, 톰 브라운, 마사 스튜어트, 보노, 바바라 월터스, 엘튼 존, 애나 윈투어,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등 뉴욕과 세계를 움직이는 명사들이 1959년 문 연 이 식당의 단골이다.
이곳에서 식사한다는 건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올랐음을 의미하게 됐고, 특히 좋은 테이블에 앉는다는 건 건 최고 중에 최고로 인정받음을 상징하게 됐다. 뉴욕타임스는 “포시즌스는 어떤 음식을 먹느냐보다 어느 자리에 앉느냐가 더 중요한 식당”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에게 거만한 포즈를 요구하자, 아주 능글맞게 잘 하시더군요./사진=김지호 기자
줄리안 니콜리니(Niccolini·60)는 어느 손님이 어느 자리에 앉느냐를 결정하는, 어떻게보면 엄청난 사회학적 권력을 행사하는 포시즌스의 지배인(maitre d‘hotel) 겸 공동소유주이다. 29일 TV조선이 주최한 ‘글로벌 리더스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니콜리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니콜리니는 1973년 미국으로 건너와 1977년부터 포시즌스에서 지배인으로 일했고, 1995년 식당을 사업파트너 알렉스 폰 비더와 함께 사들였다.
니콜리니는 “매일 오전 11시 예약명단을 확인한 뒤 손님을 식당 내 69개 테이블에 배정한다”고 말했다. “포시즌스에는 ‘그릴룸(Grill Room)’과 ‘풀룸(Pool Room)’이 있습니다. 점심 시간에는 대부분 손님이 32개 테이블이 있는 그릴룸에서 식사하고 싶어하죠. 특히 그릴룸 중앙 5개 부스(booth·칸막이한 테이블)는 누구나 탐을 냅니다.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자리죠.”
니콜리니가 손님을 테이블에 배정하는 제1원칙은 ‘얼마나 충성스런 단골이냐’이다. “처음 찾아오신 손님이건 40년 단골이건 최고의 음식과 서비스로 동일하게 모십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테이블은 단골에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배정하는 제2원칙은 ‘손님이 요즘 얼마나 잘 나가느냐’이다. “그때그때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드립니다. 식당에 온 다른 손님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포시즌스도 ‘잘 나가는 식당’으로 이미지메이킹되는 건 덤이다.
수십 년 몸에 밴 서비스정신은 어쩔 수 없는 지, 음식을 권하고 서빙하는 포즈를 자꾸 취하더군요./사진=김지호 기자
니콜리니는 그러나 “아무리 단골이 요구하더라도 매번 같은 자리를 드리지는 않는다”고 했다. “뭐든 원하는대로 된다면 인생이 무슨 재미겠어요? 우리 손님들은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을 뜻대로 할만한 영향력을 가진 최상류층이죠. 그런 분들에게 원치 않았던 나쁜 자리를 드리면 오히려 즐거워하니다. 그리고 한 단골에게 같은 자리를 계속 주게되면 지정석이 돼버려요. 그러다 다른 단골들이 ‘왜 나는 저렇게 해주지 않느냐’고 불평하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파집니다.”
니콜리니는 손님을 격의없이 편하게 대하는 것을 넘어 짓궂은 농담과 장난을 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손님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매일 신문과 잡지, 블로그 등 온갖 매체를 확인합니다. 어떤 안좋은 일이 있었는지를 특히 유심히 읽어요. 좋은 일이야 말해봐야 무슨 재미겠어요? 스캔들이나 나쁜 뉴스로 손님에게 농담을 해요. 그런다고 기분 나빠하거나 발길을 끊은 분은 거의 없어요. 몇 있기는 한데, 그런다고 안 오는 분들을 궂이 붙들지 않습니다. 포시즌스에서 식사하겠다는 손님은 줄을 섰으니까요.”
헤어진 남녀가 우연히 같은 날 식사 예약을 하면 일부러 서로 마주 보는 테이블에 지정한다. 이름이 날대로 난 남녀 명사 사이에 형성되는 냉기류가 다른 손님들에게 가십거리를 제공할 수도 있고, 둘 사이가 다시 좋아질 수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괜찮다싶은 신인 여배우가 온다고 하면 영화제작자나 TV프로듀서 옆 테이블에 앉혀 자연스런 만남을 유도한다. ‘누구 옆에는 절대 앉기 싫다’는 손님에게는 일부러 싫어하는 인물 옆 테이블에 앉힌다. “손님이 기분 나빠할 정도로 선을 넘지는 않습니다. 그러려면 손님들과 친구처럼 친하고 잘 알아야 하지요.”
유명인사들이 계속해서 포시즌스를 찾는 이유에 대해 니콜리니는 “연속성”이라고 답했다. “식당 내부는 20세기 최고 건축가인 필립 존슨과 미스 반데어로에가 54년 전 디자인한 그대로입니다. 파블로 피카소가 만든 태피스트리 작품이 54년 전과 마찬가지로 벽을 장식하고 있고요.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 요리한 최상의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님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속속들이 파악해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그대로입니다.”
수트, 셔츠, 타이, 구두 모두 톰 브라운 제품이더군요. 한때 브리오니만 입는다는 기사를 보았다고 하자,"브리오니는 이제 너무 아저씨 옷"이라더군요. /사진=김지호 기자
세심한 서비스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메뉴에 없는 음식도 손님이 원하면 어떻게든 구해다준다. “워렌 버핏씨가 데어리퀸(Dairy Queen·미국의 대중적인 유제품 브랜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겁니다. 직원 하나를 가게에 보내서 사오게 했죠. 한 손님은 핫도그가 먹고 싶대요. 역시 직원이 가까운 핫도그 가판대에서 사다가 드렸습니다. 가격은 우리 메인요리 가격인 50~60달러를 청구했죠.”
포시즌스가 핵심 가치는 유지하면서도 끊임없이 혁신하고 있다고 니콜리니는 말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맞은 뒤 메뉴를 새로 짰어요. 우리 식당을 드나드는 세계 최고 부자들조차 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게 보였습니다. 값비싼 식재료를 맛은 훌륭하지만 비싸지 않는 것으로 대체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음식값을 낮췄어요. 2000년대 초 닷컴 열풍이 불었을 때는 수트와 넥타이를 착용해야 한다는 드레스코드를 없앴죠. 오랜 단골들이 ‘넥타이도 매지 않는 애들 옆에서 밥 먹기 싫다’고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IT로 큰 돈을 번 젊은층을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명성에 안주하면 안됩니다, 특히 자신의 분야에서 정상에 있다면요. 고객이 원하지 않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포시즌스를 수십 년에 걸쳐 찾아주는 성공적인 손님들은 변화를 두려워 않고 꾸준히 진화하는 분들이라는 건 제 경험을 통해 압니다.”
/12월1일자 조선일보 사람들면에 실린 기사의 원본입니다. 워낙 흥미로운 인물이라 원고지로 15장 가까이 썼는데, 지면이 좁아 8장 정도 들어갔죠. 재밌기도 하면서 통창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에게 서비스 받으며 포시즌스에서 식사하는 인사가 저도 됐으면 좋겠습니다. 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