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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초밥, 처음엔 길거리 패스트푸드였다 - 김성윤의 맛
초밥, 처음엔 길거리 패스트푸드였다
윗줄은 오늘날의 초밥, 아랫줄은 18세기 중반의 초밥을 재현한 것이다. 요즘 초밥보다 2~2.5배 크다. 길거리 간식 달걀빵과 비슷한 크기와 모양이다. 데치거나 절인 해산물을 사용했다. 날생선을 초밥에 사용한 건 50년에 불과하다. 데친 오징어에 밥을 채운 초밥은 한국의 오징어순대와 비슷하다. 요즘은 보기 어렵다. /사진=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윗줄은 오늘날의 초밥, 아랫줄은 18세기 중반의 초밥을 재현한 것이다. 요즘 초밥보다 2~2.5배 크다. 길거리 간식 달걀빵과 비슷한 크기와 모양이다. 데친 오징어에 밥을 채운 초밥은 한국의 오징어순대와 비슷하다. 요즘은 보기 어렵다. /사진=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초밥이 주먹 만했다. 평소 먹어온 한입에 쏙 들어가는 생선초밥의 3배는 돼 보였다. 길거리 간식 달걀빵과 비슷한 크기와 모양.

초밥을 쥐어준 63빌딩 일식당 슈치쿠 초밥요리사 다카시마 야스노리(高島康則·47)씨는 “150년 전 탄생 당시의 에도마에즈시(江戶前壽司)는 이만했다”고 말했다. 에도마에즈시는 ‘에도(江戶) 성문 앞(前)에서 파는 초밥(스시·壽司)’이란 뜻. 에도는 도쿄의 옛 이름이다. 다카시마씨는 “에도마에즈시는 현대 초밥의 원형”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생선초밥을 만들어 먹은 건 7세기부터로 알려졌다. 붕어 따위 민물생선 내장을 제거한 다음 소금에 절이고 밥을 채워 삭혔다. 한국의 식해와 비슷했다. 16세기부터는 도시락 같은 틀에 밥과 생선살을 담아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달씩 숙성시켜 먹었다.

성미 급한 에도 사람들은 생선초밥이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18세기 중반 에도성 앞 포장마차 주인들이 식초로 간 한 밥에 생선살을 올려 팔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당시로서는 ‘패스트푸드’였죠. 인기를 끌자 같은 방식으로 초밥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성 안에도 생겨났죠. 포장마차 손님들은 가게 앞에 서서 허기를 때웠고, 가게 손님들은 ‘테이크아웃’ 해서 집에 가져가 먹었죠.”

당시 초밥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은 노동자들이 식사 대용으로 먹었기 때문에 크고 양이 많았다. 다키시마씨는 “요즘 초밥은 샤리(밥) 30g에 생선 15g이 표준”이라며 “18세기에는 2~2.5배 더 커서 두세 입에 나눠 먹어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냉장시설이 없었던 시절이라 날생선은 사용하지 않았다. 간장에 절인 참치나 초절임 전어, 데친 새우나 오징어를 사용했다. “현재 먹는 날생선을 얹은 초밥은 역사가 50여 년에 불과합니다. 샤리는 2차대전 이후 차츰 작아졌고요.”

2014121000178_1다카시마씨는 1995년부터 20년 가까이 한국에서 일해왔다. 그는 “이제 일본과 한국의 초밥 문화는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올챙이스시’라고 해서 밥은 작고 생선살이 길게 꼬리처럼 늘어진 초밥이 유행이었습니다. 붉은살생선을 선호하는 일본과 달리 흰살생선을 선호하는 손님이 더 많았고요.” 하지만 그는 “한국 손님들이 선어(鮮魚)보다 활어(活魚)를 선호하는 건 여전히 일본과 다르다”고 말했다. “활어가 탱탱하게 씹는 맛이 있지만, 숙성시킨 선어가 감칠맛이 더 진합니다. 하지만 한국 손님들이 활어를 선호하기 때문에 생선을 숙성시키더라도 일본보다 훨씬 짧게 합니다.”

잘 만든 초밥을 알아보는 방법은 없을까. 다카시마씨는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러워야 한다”고 말했다. “가느다란 꼬챙이로 초밥을 세로로 찔러 관통한 다음 살짝 들어올릴 수 있지만, 입에 넣으면 밥알이 확 퍼지며 생선살과 고루 섞이는 느낌이 나야 합니다.”

 

12월10일자 문화면에 쓴 기사입니다. 겨울을 맞아 기름이 자르르한 고등어나 방어로 쥔 초밥이 먹고 싶어지네요. 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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