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최남단에 있는 섬 태즈메이니아. 지난주 이 ‘지구 끝’에 갔다가 들른 식당 메뉴판에서 ‘김치(Kimchi)’를 발견했다. 한식당이 아닌, 현지 호주인이 현지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주인은 “태즈메이니아 사람들도 김치를 잘 알고 좋아한다”고 말했다.
세계적 음식이 된 김치를 학문으로 탐구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26일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세계김치연구소 주최로 ‘김치학(Kimchiology) 심포지엄’이 열린다. 김치와 김장문화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조명한 학술대회다. 국내 학자들은 물론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마시모 몬타나리 교수, 네덜란드 레이덴대학 카타지나 취에르트카 교수,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이시게 나오미치 명예교수 등 해외 유명 학자들도 참여한다.
사스를 물리친 김치, 세계화의 시작?
김치가 세계화되기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 이후다. 임재해 안동대 교수는 “김치는 건강식품답게 국제 스포츠행사에서 부각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1984년 미국 LA올림픽에서 선수촌 공식음식으로 지정된 데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도 세계 선수들에게 제공됐다. 2003년 사스(SARS)가 중국에서 발생해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지만 유독 한국에서만 감염자가 거의 없고 감염자들조차 모두 회복해 사망자가 없었다. 해외 언론들은 ‘한국인들이 김치를 먹어 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건강식품으로서 김치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일본에서도 다쿠앙보다 김치가 많이 팔려
일본에서 김치를 상식(常食)하게 된 건 1990년대 중반부터다. 이시게 명예교수는 “1960년대 한국풍의 야키니쿠 요리가 유행하면서 일본인도 김치를 먹게 되었다”며 “현재는 김치 소비량이 전통 절임인 다쿠앙을 훨씬 웃돌게 되었다”고 말한다. 취에르트카 교수는 “김치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이 바뀐 시기는 1990년대 중반”이라며 “일본에서 김치 생산이 거의 4배 늘어났고, 한국으로부터 김치 수입은 3432톤에서 3만 톤으로 거의 10배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김치의 세계화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임 교수는 “김치의 질적 향상이야말로 최고의 세계화”라고 제안한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먹는 김치만 옳다’는 고정관념은 “코카콜라의 제국주의적 세계화와 다르지 않다”면서, “한식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음식·식문화와 어울리도록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김치를 한국 전통식품이 아니라 인류(공유)의 식문화로 만들어가는 데 무게 중심을 두고 진행되야 한다”고 덧붙였다.
몬타나리 교수는 수백 가지 치즈 중에서 파르미자노(파마잔)치즈가 유독 크게 성공한 이유로 이 치즈가 갈아서 파스타에 뿌려 먹는 양념으로 사용됐기 때문이라는 점을 꼽으며 “그냥 맛(음식)만이 아니라, 맛을 구성하고 있는 시스템(음식문화)을 팔고 수출한다”고 말한다. 김치 하나만이 아니라 한국음식 전체를 소개할 때 세계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통배추김치가 대표 김치 된 배경
김치라고 하면 흔히 통배추김치를 떠올리지만, 역사는 길지 않다. 음식문화저술가 윤덕노씨는 배추김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를 “18세기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면서, 통배추김치의 역사는 “짧게는100년, 길어도 250년을 넘지 않는다”고 말한다. 18세기 중반 발달하기 시작해 19세기 속이 꽉 찬 결구형 배추가 등장하면서 지금과 같은 통배추김치의 모습을 갖춘다.
배추김치는 다양한 채소 김치를 제쳤을까. 윤덕노씨는 18세기 조선의 경제발달을 배경으로 꼽는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부유층은 물론 일반 서민도 당시 최고급 곡식인 쌀로 지은 밥을 먹게 됐다. 주식이 쌀밥으로 고급화하자 부식도 자연 ‘업그레이드’ 됐다. 이 과정에서 고려시대 이후 고급 채소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였던 배추가 김치의 주재료로 선호됐다. 양념으로 들어가는 새우젓 등 각종 젓갈류나 마늘, 생강 등도 당시에는 값비싼 조미료였다.
앞으로도 배추김치가 대표 김치의 자리를 지켜갈까. 윤덕노씨는 “식단의 서구화, 외식문화의 확산, 맞벌이 부부 증가 등으로 김치산업이 발달하는 한편 김치 소비는 감소했다”며 “김치산업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김치 표준화를 통한 단순화라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김치 종류는 다양화할 수 있어도 가정별, 지역별 김치의 특성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또 그는 “앞으로 100년 후, 200년 후에는 18~19세기 그랬던 것처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김치가 등장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삼겹살 등 육류 소비가 증가하자 묵은지가 각광받듯, 선호하는 김치의 소비형태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장문화의 현재와 미래
김치를 사먹는 가정이 늘었지만 김장은 여전히 중요한 연례행사로 전승되고 있다. 함한희 전북대 교수는 3가족의 사례를 연구한 함한희 전북대 교수는 김장 담그기가 계속되는 이유로 김장의 문화적 관념과 실용적 필요성을 언급한다. “부모는 아들과 며느리를 본가로 불러들여 가족정체성을 재확인시킵니다. 김치와 각종 곡식·채소가 분배되는 한편 자식들의 효와 현금과 선물이 교환되는 의식을 치르는 거죠. 며느리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명절보다 김장은 상호교환적이라는 점에서 젊은 며느리에게 일단 거부감이 적습니다. 노동 강도가 높아 김장을 하러 가지 않으려는 도시의 며느리들도 겨우내 김치걱정에서 해방되는 것은 물론이고 김장의 경제적 부담을 생각하면 마다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11월26일자 문화면 기사 원본입니다. 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