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내로라하는 요리사들이 한국에 오면 꼭 들르는 명소가 서울 성북동 산자락에 있다.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고 일반 가정집이다. 여기서 한 끼 식사하려면 1인당 30만~50만원을 내야 하지만, “한식의 최정점과 최첨단을 맛보고 싶다”며 선뜻 지갑을 연다. 세계 최고 레스토랑으로 꼽히는 덴마크 ‘노마(Noma)’의 오너셰프 르네 레드제피(Redzepi)는 이 집에서 식사한 뒤 “한식이 이렇게 발전했을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집 주인은 음식연구가 이종국(55)씨다. 그의 요리 철학은 ‘배려’로 압축된다. 그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제철 식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입안에서 느낀다고들 한다. 이씨는 이를 “식재료에 대한 배려”라고 말한다. “한식은 계절에 대한 배려가 담긴 음식입니다. 그때그때 나는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 만들 수 있는 요리가 1000개도 넘을 겁니다. 아무 것도 나지 않는 겨울은 어떻게 하느냐고요? 겨울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전혀 외롭지 않은 달이에요. 봄·여름·가을에 말리거나 갈무리해놓은 식재료들을 다시 끄집어내 회상할 수 있으니까요.”
그는 “한식이 아름다운 건 손님에 대한 요리사의 배려가 담겨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손님은 이런 배려의 마음을 느끼고 감동으로 웁니다. 그리고 이건 한식이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힘입니다. 한상 대접 받고 싶어하는 건 어느 민족·문화건 마찬가지거든요. 저는 배려가 없는 음식을 먹으면 화가 나요.”
그는 전을 손님상에 낼 때 간장을 찍어 바를 솔잎 붓을 곁들인다. 젓가락질에 서툰 외국인 손님에 대한 배려인줄만 알았더니, 음식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단다. “간장을 푹 찍어서 내가 만든 전을 아프게할까봐서요.”
최상의 식재료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아끼지 않는다. 바다에서 다시마만 먹고 사는 ‘군소’라는 민달팽이, 산의 향기가 그윽한 진짜 산더덕을 직접 확인하러 산지(産地)를 찾아간다. 어렵게 얻은 재료로 만든 음식에 참깨를 생각 없이 뿌려대는 것도 싫어한다. “음식 맛과 향을 왜 죽여버려요? 웃기(고명)는 없는 영양분을 보충해주는 역할만 해야죠. 보기 좋으라고요? 안 이쁘거든요.”
이씨는 ‘오성과 한음’의 오성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13대손이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 집안이다. 3남1녀 중 막내인 이씨는 입맛이 예민하고 까다로웠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먹거리를 살뜰하게 챙겼다. 시장에 갈 때도 이씨를 데려다니며 재료와 맛을 가르쳐줬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외출했을 때 형과 누나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간식 만들길 즐길 정도로 요리를 좋아했고 솜씨도 있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요리연구가가 된 사연이 재미있다. “인테리어 사무실을 차렸는데 직원들이 매일 점심을 사먹느니 제가 직접 밥을 차려줬지요.” 식당 인테리어를 할 땐 그 집 메뉴까지 짜줬다. 요리 솜씨가 차츰 소문나자 음식 칼럼을 써달라는 제안까지 들어왔다.
“15년쯤 전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사장이 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에 음식 칼럼 연재를 의뢰했지요. 매달 6페이지씩 3년을 하다보니 요리 가르쳐달라는 요청이 쏟아져들어오더군요.” 서울 웬만한 집 ‘사모님’들과 며느리들은 전부 오셔서 배웠을거예요. 음식을 가르치며 오히려 제가 더 배웠죠.” 직업도 아예 요리연구가로 바꿨다. 2005년 ‘이종국의 음식발전소’를 열고 요리 강습과 음식 컨설팅에 집중하고 있다.
“한 끼 50만원이면 너무 비싼 것 아니냐”고 묻자, 이씨는 목소리가 커졌다. “르네 (레드제피) 식당에서는 100만~150만원 받는데도 괜찮다고 해. 그러면서 한식은 6000~8000원만 넘어도 비싸다는거야. (룸살롱에서) 꽐라 되도록 양주 100만원어치 마시는 건 상관 없고. (내 음식을) 비난하기 전에 제대로 먹어봤느냐 이거야. 도라지도 마트에 파는 건 2000원이지만, 자연산 산도라지는 1만5000원이야. 음식에 맞춰서 그릇·받침도 만들고 메뉴판도 새로 제작해요. 최고를 추구하다보면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어요. 서민적인 한식도 필요하지만, 고급 한식도 필요해요. 호사가 나쁜 건 아니잖아요.”
이씨는 최근 성북동 간송미술관 앞에 각종 장아찌와 젓갈, 건어물, 그릇 따위를 파는 ‘백백’이란 반찬가게를 냈다. 도예가 이세용씨와 함께 오픈한 이곳은 언뜻 보면 미술화랑으로 여길만큼 고급스럽고 세련됐다. 이씨는 “우리는 반찬가게라고 하면 아파트 지하상가 허름하고 위생 상태 안 좋은 곳을 떠올린다”며 “서양의 델리카트슨처럼 멋지게 한국 먹거리를 보여주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식 세계화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한식을 아는 젊은 요리사가 없어요. 요리전문대학에서 한식을 전공해도, 한식의 기본인 장(醬) 담그기는 고사하고 맛도 몰라요. 이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모르는 거죠. 요리학교에 처음 입학할 때 장을 담그게 해서 졸업할 때 4년 묵은 장 항아리 하나씩 가지고 나오게 하면 어떨까요. 딴 거 안 배워도 이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이씨는 “‘깨끗한 음식’을 먹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거나 시작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웃기 없는 단정한 떡국이요. 혼탁한 세상을 혼탁한 음식과 함께 하는 건 별로잖아요?”
조선일보 문화면에 2014년 마지막날 게재된 기사의 원본입니다. 이런 수준의 한식을 하는 분도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아니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싸고 푸짐한 대중 식당도, 비싸고 세련된 고급 음식점도 두루 갖춰져야 한식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겠죠. 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