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 한 그릇 가격이 1만원에 육박하는 요즘, 소고기구이가 1인분에 1만원이라면 ‘소도 웃을 일’이라며 믿지 않을 대도시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그런데 제주도에 있는 한 재래시장에서는 이 소도 웃을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서문공설시장’에서는 한우, 그것도 1등급 소고기 1인분 200g이 1만원부터 판매된다. 맛있기로 이름 난 제주 돼지고기는 1인분 200g이 5000원이다. 당면을 넣지 않고 찹쌀과 맵쌀, 메밀가루가 들어간 제주만의 독특한 순대를 파는 가게도 서문시장에 모여있다. 멀지 않은 삼성혈 근처에는 또다른 제주 토속음식인 고기국수를 파는 가게가 몰려 생기면서 ‘국수문화거리’가 조성돼 있다.
서문시장 정육식당 골목
서문시장 정육점에서 파는 제주산 한우등심과 차돌박이, 육사시미로 구성된 1인분. 이게 1만원입니다. 뒤는 삼겹살과 목살로 구성된 제주산 돼지고기 구이 1인분은 5000원이니 정말 싸지요. /사진=허재성 객원기자
제주 토박이로 ‘서문시장 문화관광형시장 육성사업단’ 단장을 맡고 있는 이승헌(41)씨는 “서문시장이 육고기 특화시장으로 소문 나면서 제주도민과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고 했다. 서문시장은 제주국제공항에서 차로 약 15분 거리로, 제주에 도착하거나 관광을 마치고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에 들려서 식사하는 관광객이 많다.
서문시장이 제주산 소·돼지고기를 값싸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곳이 된 건 2010년쯤이다.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서문시장은 1980년대 이후 주변에 있던 시내버스터미널과 학교 등 공공시설이 떠나가면서 차츰 쇠락했다. 그러다 3년 전 시장 정육점과 식당이 힘을 합쳤다. 정육점에서 싸게 산 고기를 가져오면, 식당에서는 최소한의 가격만 받고 소기를 구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노량진수산시장 생선가게에서 구매한 생선을 시장 내 식당에 가져가면 ‘양념값’만 받고 회를 떠주고 매운탕을 끓여주고 반찬을 내주는 것과 비슷한 시스템이다.
‘정육점+시장식당 콜라보레이션’을 처음 시도했다는 한아름정육마트 주인 장선희씨가 소고기와 돼지고기 1인분을준비하는 모습. /사진=허재성
서문시장에는 한아름정육마트(064-753-1025), 부부정육점(064-758-3821), 용담정육마트(064-753-5333) 등 3개의 정육점이 있다. 세 곳 모두 제주산 한우와 돼지고기를 다룬다. 손님은 어떤 부위건 원하는대로 원하는 양대로 구매할 수 있다.
소고기의 경우 대개는 구이용으로 가장 인기 높은 등심과 차돌박이를 섞어서 산다. 1인분 200g에 1등급 1만원, 1등급 1+ 1만3000원, 1등급 2+ 1만5000원이다. 돼지고기는 오겹살과 목살이 섞인 세트가 1인분 200g에 5000원이다. ‘한아름정육마트’ 주인 장선희(52)씨는 “소고기 여러 부위가 모둠으로 담겨 나오는 5만원짜리 큰 접시 하나면 어른 넷이서 먹을 정도 분량”이라고 말했다. 전화로 주문하면 택배로 보내주기도 한다.
고기를 구입했으면 시장 안에 있는 식당으로 간다. 16개 식당 어디나 손님이 원하는대로 가면 된다. 어떤 식당을 가야할 지 모르겠다면 정육점에 물어보면 알아서 연결해준다. 식당에서는 4인 기준 1테이블당 1만원씩 받고 상을 차려준다. 4명 이상일 경우 1인당 3000원이 추가된다. 고기는 육질이 특1등급이랄 수는 없지만, 가격을 따져본다면 만족도가 매우 높은 수준이다.
서문시장 안 식당들.시장에 이제 상점은 2층에 좀 있고 전체가 거대한 식당가처럼 변했습니다. 요즘재래시장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사진=허재성
고기만 먹는다면 어떤 식당에 가건 상관 없지만, 식당마다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저마다 ‘비장의 무기’라고 할 만한 메뉴를 한두 가지씩 가지고 있다. 이승헌 단장은 “‘보내식당’은 우럭매운탕, ‘라온샘’·‘샘이네’는 순대국밥, ‘경태식당’은 비빔국수·멸치국수, ‘학사식당’은 새끼회, ‘평화식당’은 청국장, ‘대우식당’은 청국장·김치찌개·얼큰순부두, ‘영미식당’은 매운탕을 잘 한다”고 소개했다.
서문시장 ‘미성식당’ 족발무침. /사진=허재성
이중 ‘미성식당’은 족발무침(2만원)이라는 직접 개발한 음식이 인기다. 잘 삶아 야들야들한 족발을 오이·양파·고추 따위 채소와 함께 새콤달콤매콤한 양념에 무쳐 낸다. 겨자의 얼얼한 매운맛과 식초의 새콤한 맛이 입맛을 살려준다. 술안주로도 그만이다.
서문시장 순대 골목
서문시장에서 맛본 제주식 순대. 차가워도 맛있다는 게 특징이라고 제주 사람들은 말합니다./사진=허재성
이승헌 단장은 “서문시장은 원래 제주에서 순대로 유명한 시장”이라며 “제주도 웬만한 식당에서 파는 순대는 모두 서문시장에서 공급받는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고 했다. 정육점과 마찬가지로 서문시장에는 몽실할머니순대(064-753-8180), 서문별미순대(064-756-5431), 진경순대(064-752-2422) 등 3곳이 있다. 몽실할머니와 진경순대에서는 순대를 1인분씩 사먹을 수 있다. 서문별미순대는 대량 주문을 위주로 받아서인지, 찾아가니 그다지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1접시 3000원.
이 단장은 “제주 순대는 ‘마른 순대’로 먹어도 맛이 있다”고 했다. 마른 순대라? “차게 식은 순대를 말해요. 제주에서는 잔치 때 돼지고기와 순대가 빠지면 안되요. 그래서 미리 순대를 만들어서 재워놓는데, 이걸 제주사람들은 마른 순대라고 불러요. 식어도 맛있지요.”
서문시장 ‘몽실할머니순대’. /사진=허재성 기자
전통 제주순대는 당면을 넣지 않고, 맵쌀이나 찹쌀을 따로 혹은 섞어서 채운다는 점이 ‘육지’의 순대와 다르다. 식으면 말라서 굳는 당면을 쓰지 않고, 식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맵쌀이 찹쌀을 써왔던 듯하다. 맵쌀보다 비싼 찹쌀을 많이 쓸수록 당연히 고급이다. 피를 많이 넣었는데도 경상도·전라도 일부 지역 피순대보다 씹히는 질감이 훨씬 나긋나긋 부드럽다. 메밀가루를 많이 넣는다는 점도 다른 지역과 다른데, 이것 역시 부드러운 제주 순대의 식감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와 양파, 양배추 따위 채소도 풍성히 들어간다.
시장 안 대부분 식당에서는 이들 정육점에서 만든 순대를 가지고 순대국밥을 끓여 낸다. 대개 한 그릇에 6000원을 받는다. ‘샘이식당’ 주인 김숙례(62)씨는 “당면을 싫어하는 분들이 있어서 찹쌀로만 만든 순대를 쓰고, 돼지뼈를 10시간 곤 국물에 말아서 따로 삶은 돼지 내장 부속 부위를 잘게 썰어서 얹어 낸다”고 했다.
고춧가루를 넣고 끓여 내거나, 국물에 들깨가루를 넣는 등 식당마다 순대국밥 맛 내는 비결이 조금씩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훌륭하다. 원재료인 순대 그리고 신선한 돼지뼈를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는 조건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서문시장 먹거리·살거리
서문시장 생선가게 ‘현주상회’. 제주 근해에서 잡은 고등어와 삼치가 아주 통통하니 물이 좋더라구요.소금 간을 한 솜씨도 좋아 보였고요. 그래서 고등어 4마리와 삼치 2마리를 사서 택배로 집으로부쳤습니다. 구워서 먹어보니 예상대로 아주 맛있었습니다. /사진=허재성 기자
‘몽실할머니순대’ 옆에는 ‘현주상회’(064-752-7056)와 ‘정민상회’(064-724-0918) 등 생선가게 2곳이 있다. 제주도 근해에서 잡은 살이 토실토실 오른 고등어와 삼치에 굵은 소금을 척 뿌려서 슬쩍 간 해 철망 위에 널어놨는데,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게 한두 해 해온 솜씨가 아니었다. 너무 커서 대가리를 자른 고등어 1마리가 5000원이고 조금 작고 대가리 달린 고등어가 1마리 4000원, 삼치는 7000원이다. 냉동실에 들어있다는 옥돔은 크기에 따라 3마리·2마리 1만원씩 받았다. 냄새가 빠져나오지 않게 비닐로 꽁꽁 싸준다. 택배비 5000원 내고 부쳐도 된다.
떡집은 ‘서문떡방앗간’(064-758-7355)과 ‘동백떡방앗간’(064-722-4077) 등 2곳이 있다. 이곳에서 파는 오메기떡은 하나가 손 하나에 가득 찰 정도로 큼직했다. 관광지 근처에서 파는 오메기떡은 대개 한입 크기이다. 이 단장은 “원래 오메기떡은 밭일 나가서 하나만 먹고도 배가 든든하도록 큼직하게 만든다”면서 “작은 오메기떡은 최근 관광객을 상대로 팔기 위해 변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수문화거리
제주의 고기국수. 돼지뼈와 고기를 우린 국물에 국수를 말아 냅니다. 예전에는 막 밀어서 만든 국수를 썼는데, 요즘은 건면을 쓰지요. 소면이 대부분인 ‘육지’와 달리,좀 굵은 중면을 주로 사용합니다. /사진=허재성
고기국수는 돼지 고기와 뼈를 푹 삶은 육수에 면을 삶아 돼지고기 수육을 올린 제주 전통 국수음식이다. 결혼 등 큰 행사 때 먹던 잔치국수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요즘 잔치국수는 대개 멸치육수를 쓴다. 고기국수가 식당에서 파는 음식으로 대중화된 게 언제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골막식당’(064-753-6949)과 ‘파도식당’(064-753-3491)이 고기국수를 본격적으로 팔면서 유명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돼지 뼈와 고기로 뽑은 육수는 냄새 나고 기름질 것이란 편견을 가진 이들이 많지만, 맑고 담백한 편이다. 감칠맛은 소육수보다 훨씬 나은 경우가 많다. 고기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은 개운한 맛과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대개 돼지육수만을 사용하지 않고 멸치육수를 섞어 사용하거나, 닭육수를 더하기도 한다.
제주시 ‘국수문화거리’에 있는 ‘자매국수’는 인기가 많아 가게 앞 벤치에 손님이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습니다. /사진=허재성
삼성혈 옆을 지나는 삼성로 그리고 삼성로에 직각으로 붙어있는 신산로에 고기국수 전문점이 스무 곳 가까이 모여있다. 파도식당도 원래 삼성로에 있다가 현재 위치한 일도2동으로 이전했다. 제주시에서 최근 이 두 거리를 ‘국수문화거리’로 지정했다. ‘자매식당’(064-727-1112)과 ‘만세국수’(064-727-7056), ‘삼대국수’(064-759-6644)가 이름 났다. 대개 한 그릇 6000원 받으며, 멸치국수를 함께 낸다.
/11월14일자 주말매거진에 쓴 ‘전국 맛골목 투어-제주’편의 원본입니다. 구름에